이구동의 홈페이지에 등재했던 자료 옮김-명사설 명 칼럼(2000년 당시)
흙비
(2000년 3월 20일 이규태 코너에서 이 구동이 복사 전제함)
작금 별나게 흙비가 잦고 황사의 농도가 짙은 것은 고비사막이 가물어 풀이 자라지 않은데 편서풍이 모래를 일으켰기 때문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이 모래바람이 진원지에서 얼마나 무서운지 탐험가 헤딘의 기록을 옮겨본다. 「서풍을 탄 모래바람 속에 들면 밀려드는 탁류를 거슬러 가는 듯한 압력을 받았고 몸을 30도로 굽히지 않고는 단 한 걸음도 뗄 수가 없다. 얼굴이 노출되면 밤송이에라도 찔린 듯하고 이동을 멈추면 순식간에 허리 밑을 매장 당해 빠져 나올 수 없게 된다. 이를 피해 텐트를 치고 들어앉아 있으면 고스란히 생매장으로 직결되었고.」
이 황사가 육지에 떨어져 황토가 되고 바다에 떨어져 황해가 되었으며, 강에 떨어져 황하가 되어 중국에 황색 문명을 잉태시킨 것이다. 최초의 황제요 천자가 사는 궁도 노란 기와집이며 옷도 침구도 식기도 가마도 장막도, 그리고 앞세우고 가는 깃발도 모두가 노랗다. 그래서 마지막 황제 부의로 하여금 스스로를 「황색 포로」라고 자칭하게 했던 황사다.
황사가 우리 나라 기상에 이변을 가져다 준 사례도 유구하고 잦다. 흙비(황토우)는 신라 혜공왕 16년이래―, 흙눈(적설)은 고구려 보장왕 3년이래 정사의 기록에 부지기수다. 조선조 인조 5년에는 하늘에서 피비가 내려 풀잎을 모두 붉게 물들였다 했고, 고려 현종 때는 흙안개(황무)가 나흘 동안 거치지 않아 질병이 번져 죽는 자가 속출하기도 했다.
황사이변이 있을 때마다 우리 조상들은 정치의 잘못으로 음양의 조화가 어긋나 일어나는 천제의 경고로 겸허하게 받아들였었다. 고려 현종 때 황무에는 정승 유진이란 사람이 형정이 민심에 어긋난 때문이라 상주하여 형정개혁을 했고 7일 동안 잇따른 황사로 눈뜨고 다닐 수 없었다던 공민왕 16년의 3월 황사에는 임금과 신돈이 문수회라는 법회를 열고 천심의 응징 앞에 무릎 꿇었다.
연일 짙은 황사와 흙비로 황사 병이 만연하고있는 작금이다. 입후보자의 3분의 1이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고 4분의 1이 군에 가지 않고서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이 코미디를 내려보고 천제께서 묵과할 수 없어 일으킨 모래바람이 분명하다.
대통령 지망생들에게
(법정스님의 글을 이 구동이 복사 전제함 2000년 3월 29일)
비가 내리다가 맑게 갠 날, 개울가에 앉아 흐르는 물에 벼루를 씻었다. 잔잔히 흐르는 개울물소리를 들으면서 벼루를 씻고 있으니 마음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문득 내 안에서 은은한 묵향이 베어 나오는 것 같았다.
이렇듯 맑게 흐르는 개울물도 사나운 폭풍우를 만나면 흙탕물로 온통 폭포를 이루어, 골짜기가 떠나갈 듯이 소란스럽다. 이런 날은 자연의 일부분인 내 마음도 스산해져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밤에는 넘치는 물소리 때문에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한다. 한 산중에 사는 나무와 짐승과 새들도 그런 내 기분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한 생명의 뿌리에서 나누어진 가지들이기 때문이다.
▼ 한 산촌 일꾼의 푸념 ▼
인적이 끊긴 깊은 산중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나그네가 그 산중에 은거하고 있는 한 노인을 만나 마을로 내려가는 길을 물었다. 노인은 단 한마디로 「흐름을 따라가게(隨流去)」라고 일러주었다. 산중의 개울물은 이 골짝 저 골짝을 거쳐 마침내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촌락으로 지나가게 마련이다.
흐름을 따라가라는 이런 가르침은 인생의 길목에도 적용될 것이다. 세상을 살다가 갈 길이 막히면 절망을 한다. 이런 때는 뛰어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 절망할 게 아니라 「흐름」을 찾아야 한다. 그 흐름은 마음이 열려야 만날 수 있다. 지금까지 쌓아온 벽을 미련 없이 허물고 다리를 놓아야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것은 벽이고, 이어주는 것은 다리다. 벽은 탐욕과 미움과 시새움과 어리석음으로 인해 두터워가고, 다리는 신의와 인정 그리고 도리로 인해 놓여진다. 다리는 활짝 열린 마음끼리 만나는 길목이다. 좋은 세상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믿음과 사랑의 다리가 놓여진 세상이다.
내 오두막에 일이 있을 때면 와서 거들어주는 산촌의 일꾼이 있는데, 아침나절 그가 올라와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이번에는 또 어떤 사람이 나와서 뭘 해먹을지 알 수 없군요」라고 했다. 물론 금년 말에 있을 대선을 의식, 청와대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그가 남기고 간 이 말이 짙은 여운을 남긴 채 내 머리 속에서 맴돌았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그 동안 참으로 불행한 역사를 만들어 온 것 같다. 국권을 국민들로부터 위임받은 대통령 중에서 국민들로부터 단 한사람도 신뢰와 존경을 받는 이가 없었다니 얼마나 불행한 역사의 현실인가.
독선과 아집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국외로 피신 객사한 대통령, 군인들의 총칼 앞에 맥없이 자리를 비켜선 기억도 희미한 대통령,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하여 장기집권으로 인권을 무참히 유린하다가 마침내 피비린내를 풍기면서 막을 거둔 유신독재의 대통령, 내란을 일으켜 권력을 잡고 그 권력을 이용해서 부당하게 축재한 죄로 오늘도 감옥에서 옥살이를 하고 있는 전직 두 대통령, 개혁을 부르짖다가 경제를 파탄에 이르게 하고 분수를 모르고 설친 자식 때문에 모처럼 세운 문민정부의 위상도 묻혀버린 풀죽은 현직 대통령.
과거와 현재를 통해 7인의 대통령을 하나하나 헤아려 보아도, 어느 한 사람 우리가 존경하고 받들 인물이 없다는 것은, 그 당사자의 불행이기에 앞서 우리 모두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집터가 그래서인지, 들어가는 사람마다 그런 사람들이어서 그런지 한 사람도 뒤끝이 온전한 사람이 없다. 그런데도 서로가 앞다투어 그 집에 들어가겠다고 말 그대로 난장판이다.
자신이 대통령이 되어야만 나라가 바로 선다고 호언장담하는 대통령 지망생들, 오로지 표를 얻기 위해 한 입으로 이 지역에 가서는 이렇게 말하고, 저 지역에 가서는 저렇게 말하는 겉과 속이 다른 정치가들을 보면서, 문득 흐루시초프가 한 말이 떠올랐다. 「정치가란 시냇물이 없어도 다리를 놓겠다고 허풍을 떠는 자들이다」.
▼ 멍든 국민가슴 치유를 ▼
올 한해는 청와대에 들어가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 때문에 나라 안이 온통 시끌시끌할 것이다. 오늘 아침 현재 여덟 사람이 들떠있지만 결국은 영광스런, 아니 고독한 그 한 자리를 위해 나머지 사람들은 들러리가 되어야 한다. 막판에 가면 고질적이고 망국적인 저 지역감정에 또 불이 붙을지 모르겠다. 이번에도 그렇게 되면 우리는 무엇이 될 것인가.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있는데 우리는 묵은 수렁에서 언제쯤 헤어 나올지 걱정이 앞선다.
대통령 지망생들에게 희망과 기대를 갖기보다는 순박한 산촌사람 입에서 「이번에는 또 어떤 사람이 나와 뭘 해먹을지 알 수 없군요」라는 말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은, 국민들 마음이 그만큼 정치가들에 의해서 멍들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같은 불신의 상처부터 치유해줄 수 있는 정직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그 집으로 들어갔으면 좋겠다. 퇴임 후에도 증언대에 서거나 감옥에 들어가지 않고, 그 인품과 업적을 온 국민이 기릴 수 있는 덕망 있는 사람이 그 집주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보왕삼매론
(2000년 3월 29일 법정스님 법문 중에서 이 구동 복사 편집함)
보왕삼매론에 대해 얘기하려고 합니다.
신앙 생활은 끝없는 복습입니다.
우리가 절에 가서 법문을 듣다 보면 대개 비슷비슷한 말씀 아닙니까. 신앙생활에 예습은 없어요. 하루하루 정진하고 익히는 복습이지요. 영적인 체험은 복습의 과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체험이라는 것은 하루하루 비슷하게 되풀이되는 복습의 과정을 통해서 얻어집니다. 복습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어제까지 익혔던 정진은 어제로써 끝나는 겁니다. 오늘부터 새로운 시작입니다.
지금까지 보왕삼매론 많이 들었죠? 이제 다시 복습 삼아서 말씀드립니다. 지금까지 들었던 것 모두 잊으세요. 그건 과거사예요. 오늘 이 자리에서 함께 음미하는 겁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사바세계라 합니다. 사바세계가 무슨 뜻입니까. 범어 산스크리트에서 온 말인데 사하다트, 사하를 중국말로 옮기다 보니까 사바가 됐는데 이 말을 우리말로 하자면 참고 견디어 나가야 하는 세상이란 뜻이에요. 참을 인(忍)자, 흙 토(土)자 토(忍土). 즉, 우리가 사는 세계를 사바세계 혹은 '참는 땅'이라는 겁니다. 또는 감 인 토, 견딜 감(堪), 참을 인(忍)자 즉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나가는 것이 참고 견디어 나가는 세상이다, 이런 뜻입니다.
참고 견디면서 살아가는 세상이기 때문에 거기에 삶의 묘미가 있어요. 모든 것이 우리 뜻대로 된다면 좋을 것 같지만 세상사는 재미가 없을 거예요.
보왕삼매론은 이런 사바세계를 살아가면서 어떤 마음가짐을 갖고 살아야 할 것인가를 옛 선사들이 교훈으로 얘기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생활의 지혜예요. 또 순경계가 아니고 역경계, 삶의 거스름 속에서 터득하는 생활의 지혜, 자기 관리에 대한 일종의 처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제가 읽고 해설하겠습니다.
첫째,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병고(病苦)로써 양약(良藥)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이 몸이라는 게 지수화풍(地水火風)의 네 가지로 이뤄졌다고 하지 않습니까? 또 인간의 존재는 반야심경에 나오듯 오온, 즉 색 수 상 행 식, 물질적 요소와 정신적 요소가 합쳐서 만들어진 유기적 존재입니다. 본래부터 있었던 게 아니라 어떤 인연이 닿아 이런 형상을 갖추고 나왔습니다. 또 인연이 다 하면 이게 흩어지고 말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 몸 자체가 무상한 거예요. 늘 변하는 겁니다. 고정돼 있지 않습니다. 생노병사라 하잖아요. 저를 오랜만에 본 신도나 스님들은 '아이구 스님두 이제 많이 늙으셨네요'합니다. 중이라구 안 늙는 재간이 있습니까? 부처님도 생노병사 하셨는데. 그게 우주의 질서예요. 그러나 영혼에는 생노병사가 없다고 하잖아요. 거죽은 생노병사가 있다지만 알맹이는 생도 없고 노도 없으며, 병도 없고 사도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선 일상적인 우리를 갖고 얘기하는 겁니다. 몸에 어떻게 병이 없을 수 없습니까? 그게 유기체인데. 탈이 나는 거지요. 병을 앓을 때 신음만 하지 말고 그 병의 의미를 터득하라는 말예요. 평소에 건강했을 때 생각해 보지 못했던 일들을 앓을 때 생각해 보라는 겁니다. 이웃에게 고마움도 느껴야 하고 내가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왔는가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는가, 내 인간관계는 어떠했는가, 나는 직장에서 얼마나 성실하게 살아왔던가 하는 것을 스스로 자기 성찰할 수 있는 계기로 삼으라는 겁니다.
병고 자체가 죽을병이 아니라면 그 병을 통해서 새로운 눈을 뜨라는 겁니다. 양약을 삼으라는 말이지요. 사람의 몸은 허망한 유기체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함께 모여있지만 이 다음 순간 또 어떻게 될지 몰라요.
예측할 수 없는 존잽니다. 본래 그런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 몸 가지고 늘 건강하기를 바라지 말라는 겁니다. 이 말은 즉 건강했을 때, 내게 건강이 주어졌을 때 잘 살라는 거예요. 허송세월 말라는 겁니다. 인생을 무가치한 곳에 쏟아 버리지 말라는 거예요. 육신의 병은 약으로 다스릴 수 있어요. 정신적인 병은 약으로써 다스리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얼마나 허약합니까? 옛날보다 가진 것도 많고 아는 것도 많고 여러 가지 편리한 시설 속에 살고 있는데 체력과 의지는 자꾸 떨어져요. 어떤 게 몸에 좋다고 하면 하루아침에 모두 그 쪽으로 쏠리잖아요? 이렇게 허약합니다. 옛날 농사짓고 살던, 이런 흙에다 뿌리를 내리고 살던 시절에는 흙으로부터 많은 기운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런 흙의 교훈을 몸소 익혔기 때문에 그렇게 허약하지 않았는데 이젠 자꾸 흙으로부터 멀어지니까, 대지로부터 멀어지니까 그렇게 허약해지는 거예요. 생각 자체가 허약해졌어요. 몸이 조금만 어떻다 하면 하루아침에 좌절하잖아요? 중생의 병은 업에서 나옵니다. 업이란 뭡니까? 하루하루 익히는 생활 양식이에요. 생각이라든가 먹는 음식이라든가 생활습관 이것이 건강하게도 만들고 병도 만듭니다. 중생의 병은 업에서 나옵니다. 보살의 병은 어디에 있는가. 자비심. 유마경에 중생이 앓기 때문에 내가 앓는다는 말씀이 있잖습니까?. 어머니들은 자식이 아플 때 같이 앓잖아요. 이게 정상적인 경웁니다. 자식이 밤새 잠 못 자고 앓을 때 같이 앓는 거예요. 그게 어머니예요. 생명의 뿌리니까. 그런데 자식이 앓고 있는데도 한쪽에서 쿨쿨 자고 모른 체 한다면 그건 어머니가 아니에요. 가짜예요. 이게 누가 시켜서 그런 게 아닙니다. 원천적으로 자식이란 것은 모태에서 나온 가지 아닙니까? 뿌리에서 파생된 가지라고요. 가지가 앓을 때 뿌리가 앓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중생의 병은 업에서 나오지만 보살(어머니들이 보살이지요)의 병은 자비심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이건 정상적인 경우고 세상이 이렇게 막 돼가다 보니까 자식이 앓는지 마는지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만 헬스클럽 다니고 잘 먹고 지내지 집안 식구들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는, 이런 희한한 사람도 더러 있잖아요? 모든 게 선지식이에요. 우리 앞에는,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둘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선지식입니다. 좋은 일은 좋은 일대로 언짢으면 언짢은 대로 우리의 삶에 교훈을 주고 있어요. 좋은 일이라면 본받아야겠지만 좋은 일이 아니라면 본받을 필요가 없는 겁니다.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병고(病苦)로써 양약(良藥)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다시 말하면 순경계가 아닌 역경계에서 그걸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처세훈입니다.
둘째, 세상살이에 곤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제 잘난 체하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일어난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하셨느니라.
이 세상을 고해라 하잖습니까? 고통의 바다라고. 사바세계란 말은 그런 뜻이에요. 우리가 어려운 세상, 고해, 사바세계를 살아가면서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기만 바랄 수는 없습니다. 어려운 일이 쌓여있는 것이죠. 곤란합니다. 어떤 집안을 놓고 보더라도 밝은 면도 있고 어두운 면도 있습니다. 어떤 개인의 인생도 그렇고. 세상살이에 곤란 없게 되면 사람들이 넘치게 돼요. 잘난 체 하고 남의 어려운 사정을 모르게 됩니다. 마음이 사치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는 거예요. 자신의 근심과 걱정을 밖에서 오는 귀찮은 것으로 생각지 말라는 거예요. 자신의 삶의 과정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숙제로 생각해야 해요. 우리 집안의 어떤 걱정과 근심거리가 있다면 회피해선 안 됩니다. 그걸 딛고 일어서야 해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왜 우리 집안에 이런 액난이 닥치는가, 이것을 안으로 살피고 딛고 일어서라는 거예요.
우리는 이 세상에 저마다 자기 짐을 지고 나오잖아요. 그 짐마다 무겁고 달라요. 누구든 이 세상에 나온 사람들은 남들이 넘겨볼 수 없는 짐을 지고 있다니까요. 그런 근을 지니고 있어요. 그것이 그 인생이에요. 그러니까 집안에 무슨 어려움이 있다고 나쁘게만 생각지 마세요. 그 어려움을 통해서 그걸 딛고 일어서는 새로운 창의력을, 의지력을 계발하라는 우주의 소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세상은 살아갈 만한 세상이 됩니다.
처음부터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이 사바세계라는 것, 참고 견뎌야 할 세계. 그런데 여기에 묘미가 있어요. 만약 이곳이 극락이나 지옥이라면 아무 재미가 없어요. 극락? 아무 고통도 없다는 거예요. 무슨 생각만 해도 몰려온다는 거예요. 물론 우리가 볼 때 이상적으로 추구해야 할 세계입니다. 그러나 재미없어요. 또 지옥? 너무 고통스러워서 감내할 수가 없어요. 사바세계는 그 중간이에요. 그러니까 참고 견딜만한 세상이란 것이죠.
셋째, 공부하는 데에 마음에 장애 없기를 바라지 말라.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된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어라'하셨느니라.
공부라는 것은 꼭 스님이나 신도들이 정진하는 것만 뜻하는 게 아닙니다. 공부한다고 해서 학생들이 공부하고 스님들이 수행하는 것만 뜻하는 게 아니에요. 이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에요. 장애 없는 세상이 어디 있습니까? 다 장애가 있단 말예요. 좋아서 사랑한다는 데도 삼각관계니 뭐니 해서 장애가 있잖아요. 다 장애물이 있다니까요. 장애 없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스님들도 그렇고 세상 사람들도 그렇고 한 평생 세상을 살다보면 무수한 장애물 경주예요. 지금까지 우리가 이 자리에 오면서 얼마나 많은 장애물을 헤치고 왔습니까? 그러니까 인생이란 것은 장애물 경주라니까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이 장애물이. 해탈이란 뭡니까? 그런 장애물을 넘어서 안팎으로 자유로워진 상태, 안팎으로 홀가분해진 상태 이걸 해탈이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장애라는 것은 해탈로 이르는 디딤돌이에요. 발판이에요. 그런 장애가 없으면 해탈도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모든 게 다 필요한 존재이니까요. 이 우주에는 다 필요한 거예요. 어떤 미생물이 됐든 다 우주에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생겨났거든요. 그런데 그것이 귀찮다고 해서 농약으로, 강한 살충제로 죽여 보세요. 그 미생물만 없어지는 게 아니고 그것이 연쇄반응을 일으켜서 우리에게 진짜 없어서는 안 될 이로운 것까지 모두 사라지잖아요. 오늘 이 생태계의 변화라든가 환경문제, 또 지구 온난화 문제 이게 다 뭡니까?
너무 우리가 전체적인 흐름과 조화를 모르고 어떤 부분적인 것에 갇혀서 그것만 지나치게 소비하고 낭비하고 혹사시키다 보니까 지구 자체가 인간들을 감당 못하는 거예요. 그래 여기저기에서 털어 내느라, 재채기하느라고 지진도 일으켰다가 또 여기저기 불도 일으켰다가 그렇잖아요. 지구에 사는 인간들이 마치 물건처럼 하도 귀찮게 하니까 털어 내느라고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는 거예요. 지구가 뭡니까. 우리가 기대려는 생명의 바탕이에요. 우리만 살고 지나갈 생명의 바탕이 아닙니다. 영원히 존속돼야 할 생명의 바탕입니다. 그런데 20세기 후반 들어와서 우리가 너무도 지구를 함부로 대했기 때문에 그 보상으로써 지금과 같은 여러 가지 이변이 오는 거지요.
장애 없길 바라지 마세요. 장애라는 것은 다 그걸 뚫고 지나갈 수 있는 해탈의 길로 이어진 길목이기 때문에 장애를 거부하지 말고 그걸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번뇌를 보리로 전환하고 생사를 열반으로 전환하고 고뇌를 기쁨으로 전환하라는 거예요.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으라는 거예요. 장애 없는 해탈이 안 됩니다.
넷째, 수행하는 데에 마(魔)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 데에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한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모든 마군으로써 수행을 도와주는 벗을 삼으라'하셨느니라.
마란 뭡니까? 나쁜 거예요. 잠잠하게 정진하고 싶은데 늘 졸음이 온다거나 또 공연히 망상이 일어난다거나 다 마입니다. 호사다마(好事多魔), 좋은 일에는 마가 낀다고 하잖아요. 또 도고마성(道高魔盛),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한 대요. 이것도 그렇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그릇을 키우는, 우리의 기량을 키우는 소식으로 받아들여야지요. 우리가 어떤 좋은 일을 하려면 반드시 장애물이 생겨요. 그걸 회피해선 안 됩니다. 회피할 수도 없는 거구요. 그걸 딛고 일어섬으로써 새로운 기량, 새로운 의지력, 내가 지금까지 갖추지 못한 새로운 그릇이 마련되는 거예요. 집에서도 그래요. 무슨 사업하려고 하는데 부도직전에 어려운 일이 닥친다거나 또 혼사를 받았는데 엉뚱한 장애가 생긴다거나 누구나 이 사바세계에서 겪을 수 있는 일이라니까요. 그것을 겉으로만 밀어내려고 하지 말고 안으로 곰곰이 받아들이라는 거예요. 안에서 새기며 의미 부여를 하라는 거예요. 이것은 단순한 관념유희가 아닙니다. 소극적인 삶의 태도가 아니에요. 이건 삶의 지혜예요. 우리가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려움이 닥칠 때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 할 때 이런 옛 성인들의 말씀을 의지해서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수행하는데 마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 데에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한다. 서원. 저마다 서원이 있잖아요. 마음속으로 서원이 있어요. 꼭 수도 세계만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가 사업하는데도 그렇잖아요. 어떤 기업을 경영하는데도 나름대로 서원이 있잖아요. 이 기업을 키워서 그것을 사회적으로 어떻게 기여하겠다 하는 서원들이 있다고요. 그런데 어떤 장애가 없이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된다면 언제 내가 그런 서원을 세웠는가 싶을 정도로 스스로 후퇴하고 만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모든 마로써 수행을 도와주는 벗을 삼으라 이렇게 옛 성인이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다섯째, 일을 계획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말라. 일이 쉽게 풀리면 뜻이 경솔해지기 쉽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많은 세월을 두고 일을 성취하라' 하셨느니라.
모든 일이 너무 쉽게 되면 안 좋아요. 쉽게 이뤄지면 쉽게 무너져요. 공이 들어가야 합니다. 부실 공사라는 게 뭡니까? 정당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너무 쉽게 이뤄졌기 때문에 쉽게 무너지는 거예요. 인생도 마찬가지예요. 어려움이 있어야 해요. 어려움이 없이 자란 아이들, 이 다음에 어려운 일 있으면 그걸 극복 못해요. 그냥 아파트에서 뛰어 내린다구요. 이게 다 고해라니까요. 사바세계, 참고 견뎌야 할 세계라니까요.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가려면 그때그때 면역을 갖춰야 해요. 일이 쉽게 되길 원하지 마세요. 모든 게 차례가 있는 겁니다. 하나의 씨앗이 땅 속에 들어가서도 사계절의 질서가 따라야 움이 트고 꽃이 피며 열매를 맺잖아요. 너무 쉽게 풀리길 원하지 마세요.
뜸을 들이는 과정이 있어야 하잖아요. 뜸을 들여야 한다고. 많은 세월을 두고 일을 성취하라. 오랜 세월을 두고 성취하라는 거예요. 많은 세월을 두고 기량이 커지고 그런 도량을 감당할 만한 자질이 갖춰지는 거예요. 아직은 내 그릇이 그런 도량을 감당할 만한 준비가 안 됐는데 만약 거기에 무슨 일이 뜻대로 된다면 교만해지고 안이해진다 구요.
여섯째,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말라. 내가 이롭고자 한다면 의리를 상하게 된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순결로써 사귐을 깊게 하라'하셨느니라.
친구란 뭡니까. 또 다른 나예요. 또 다른 내 자신이라고. 친구와 나를 다른 사람으로 보지 마세요. 또 다른 내 분신이라니까요. 그래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하잖아요.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듯 믿음과 의리, 신의로써 인간관계가 이뤄져야 하는데 특히 친구지간은 그래야 해요. 믿음과 의리가 없으면 친구지간이 아닙니다. 스승과 제자, 부부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예요. 모든 인간관계에는 그런 믿음과 의리, 하나 곁들인다면 예절도 들어가야 해요. 친할수록 예절이 갖춰져야 해요. 예절은 뭡니까? 사람의 도리죠. 사람의 품위고. 좋은 인간관계에는 반드시 믿음과 신의, 예절로 이뤄져야 해요. 친구? 내 부름에 대한 응답이에요. 그러니까 유유상종, 끼리끼리 어울리잖아요. 친구지간에 친구를 수단으로써 자기 출세하는데 발판으로 삼지 말라는 거예요. 순결로써 사귐을 깊게 하라, 인간 관계를 두텁게 하라는 거예요.
우리가 인생을 살만큼 살고 나면 무엇이 남습니까? 남는 게 아무 것도 없어요. 관계만 남습니다. 내가 잘 산 인생이라면 좋은 관계가 남고 내가 잘못 산 인생이라면 언짢은 관계만 잔뜩 남는 거예요. 관계를 통해서, 이웃을 통해서, 친구를 통해서 거듭거듭 인간형성의 길로 나가야 합니다. 친구는 고마운 존재예요. 왜냐하면 나를 그렇게 일깨워주니까. 나를 풍요롭게 만들고 나를 깨우쳐주니까.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눠 갖기 때문에.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말라. 내가 이롭고자 한다면 의리를 상하게 된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순결로써 사귐을 깊게 하라'하셨느니라.
일곱째,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기를 바라지 말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면 마음이 스스로 교만해진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 무리를 이루라'하셨느니라.
묘미가 있는 말이에요.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 무리를 이루라는 거예요. 이게 뜻맞는 사람들끼리 살아야 하는데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끼리 어울리라는 게 상당히 갸웃갸웃해지는데 한 가정을 두고 생각해 봅시다. 가정에 아무 탈이 없는, 정말 서로 화합하고 화목한 가정이 이 세상에 더러 있겠지요. 많지는 않아요. 다 갈등이 있어요. 집안에 모두 효자만 있다면 좋을 것 같지만 그 집안 재미없어요. 인생을 모른다구요. 불효가 있기 때문에 효가 문제가 되는 거예요. 불효자가 있기 때문에 효의 값을 아는 거예요. 돌담을 쌓는데 똑 같은 돌은 필요가 없습니다. 큰 돌, 작은 돌, 모난 돌, 납작한 돌 다 필요하잖아요. 우리 조직사회, 이 세상도 마찬가지예요. 저마다 각기 독특한 개성이 틀린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거예요. 이때 전체적인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서로가 노력하면 돼요. 조화가 깨지면 그건 병든 상태이기 때문에 안 되고 자기 개성을 마음껏 발휘해서 전체적인 조화를 이룰 수 있으면 되는 겁니다. 부모들이 해야 할 일은 그거예요. 큰놈은 이런데 작은놈은 이렇더라. 비교하지 마세요. 비교하면 기분 나쁜 겁니다. 다 한 몫을 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세요. 어디에 내놓든 사람으로서 한 몫을 하면 된다니까요. 모두가 우등생? 말도 아니지. 우등생 아닌 사람이 있으니까 우등생이 있는 거지요.
여덟째, 공덕을 베풀 때에는 과보를 바라지 말라. 과보를 바라게 되면 불순한 생각이 움튼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덕 베푼 것을 헌 신처럼 버리라'하셨느니라.
공덕이란 공적과 덕행이지요. 한마디로 선행이에요. 선행을 베풀 때는 과보를 바라지 말라. 결과를 바라지 말라는 거예요. 과보를 바라면 장삿속이에요. 신앙생활은 공리성을 배제해야 합니다. 계약이 아니에요. 기도할 때, 요즘 수능시험 때문에 다급해진 엄마들 많지요? 결과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합격이 됐든 불합격이 됐든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기 때문에 좋은 점수가 나오든 덜 나오든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그냥 최선을 다 할 뿐이에요. 내가 안 할 수 없으니까 간절한 마음에서 기도할 뿐이지 따로 무슨 결과, 결과 갖고 따지지 말라니까요.
기도란 뭡니까?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할뿐이에요. 결과를 바라지 말라는 거예요. 내가 간절한 마음으로 하면 간절한 메아리가 있게 마련이에요. 그게 우주의 질서입니다.
공덕을 베풀 때에는 과보를 바라지 말라. 과보를 바라게 되면 불순한 생각이 움튼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덕 베푼 것을 헌 신처럼 버리라'하셨느니라.
아홉째,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이익이 분에 넘치면 어리석은 마음이 생기기 쉽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적은 이익으로써 부자가 되라'하셨느니라.
작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행복의 비결은 결코 크고 많은데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경제 현실이 어떻습니까? 그저 입만 벌리면 다들 경제 타령하잖아요. 하루에도 기업체들이 몇 개씩 도산되고.... 그런데 인간 생활이 경제만이 전부가 아니에요. 우리가 너무 지금 그런 일에만 치우치고 있다고요. 세계의 흐름이 그러니까. 그러니까 분에 넘치게 과소비하고 있잖아요. 우리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고. 오늘날 경제가 어려운 것은 일찍이 우리 그릇은 만들어놓지 않고 자꾸 욕심껏 뭘 담기만 하려고 했던 과보에요.
오늘의 불황은 우리들 마음이 그만큼 빈약하다는 증거예요. 그릇을 키우려면 눈앞의 이해관계에 매달리지 말고 덕을 길러야 합니다. 개체를 넘어서 전체를 생각해야 한다니까요. 소욕지족(少慾知足). 작은 것으로써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거예요. 사람은 만족할 줄 알아야 해요. 만족할 줄 알면 잘 사는 거예요. 만족할 줄 모르면 늘 갈증 상태죠. 오늘날 우리들은 무엇을 갖고도 만족할 줄 모릅니다. 그렇게 됐어요. 늘 갈증 상태예요. 작은 것을 갖고도 고마워하고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넉넉해져요.
열째, 억울함을 당할지라도 굳이 변명하려고 하지 말라. 억울함을 변명하다 보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된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의 문을 삼으라'하셨느니라.
사필귀정이란 뜻인데 모든 잘잘못은 반드시 바른 길로 돌아갑니다. 시간이 지나면 검고 흰 것이 저절로 드러나요. 진실은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습니다. 마치 꽃향기처럼. 그렇기 때문에 굳이 변명하려 들지 말라는 거예요. 변명하게 되면 거기서 원망하는 마음, 여러 가지 잡음이 생기기 때문에 굳이 변명하지 말라는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 다 드러난다는 거예요. 참고 견디면서 안으로 자기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막히는 데서 도리어 트이는 것이요, 트임을 구하는 것이 도리어 막히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많은 장애 가운데서 바른 깨달음을 이루셨다. 요즘 세상에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먼저 역경에서 견디어내지 못한다면, 어떤 장애가 부딪칠 때 그것을 이겨낼 수 없다. 그래서 마침내는 법왕의 큰 보배까지도 잃게 될 것이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마음에 깊이 새겨 생활의 지혜로 삼아야 할 것이다.
결론 삼아서 말씀드리지요.
역경을 이겨내지 못하면 자신이 지닌 생명의 씨앗을 꽃 피울 수가 없습니다. 저마다 자기 나름대로의 꽃이 있어요. 다 꽃씨를 지니고 있다고요. 그런데 역경을 이겨내지 못하면 그 꽃을 피워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의 씨앗이 움트기 위해서는 흙 속에 묻혀서 참고 견디는 그런 인내가 필요해요. 그래서 참고 견디라는 겁니다. 거기에 감추어진 삶의 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사바세계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해 주시길 바랍니다. 극락도 지옥도 아니라는 거예요. 사바세계. 참고 견딜만한 세상. 여기에 삶의 묘미가 있습니다.
가끔 외우시면서 생활의 지혜로 삼기 바랍니다.
여백의 아름다움
(법정 스님 칼럼 중에서 2000년 3월 30일 이 구동 복사 편집함)
맑고 향기롭게
지난 연말 조계사에서 종권을 둘러싼 못된 중들의 상상을 초월한 난동이 벌어졌을 때, 불교신자와 일반 사회인들이 입은 마음의 상처와 환멸은 극에 달했을 것이다. 같은 옷을 걸친 인연으로, 산중에서 안거 정진 중인 무고한 스님들도 깊은 상처와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마다 보도되는 라디오 뉴스를 들으면서 내 자신도 참괴의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사흘동안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중국 흑룡강성과 유럽과 미주에 있는 신자들이 보내온 편지에도 한탄과 분노의 소리가 가득 담겨 있었다.
같은 중으로서 낯을 들고 다닐 수 없어 한동안 바깥출입을 자제했었다. 먹물 옷을 걸치고 있다는 사실에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출가 수행자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온갖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 자신을 청정하게 지키고 남을 보살펴 주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정신적으로 뛰어난 자질이 아니면 아무나 감당할 수 없는 길이다.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저질들이 종교집단을 이루면 동서고금을 물을 것 없이 그 조직은 반드시 부패하기 마련이다.
마음에 입은 상처가 심할 때 더러는 옛 사람의 서화에서 위로를 받을 때가 있다. 무심히 서체와 그림을 보고 있으면 옛 사람의 그 기개와 인품이 함께 들여다보인다.
허균이 엮은 「한정록(閑情錄)」에는 왕희지에 대한 일화가 몇 가지 실려 있다. 중국 동진 때 그는 산음(山陰)에서 살았다. 밤에 큰 눈이 내렸는데 한밤중 잠에서 깨어나 창문을 열자 사방은 눈에 덮여 온통 흰빛이었다.
그는 일어나서 뜰을 거닐며 좌사(左思)의 '초은시(招隱詩)'를 외다가 갑자기 한 친구 생각이 났다. 이때 그 친구는 멀리 섬계라는 곳에 살았는데, 서둘러 작은 배를 타고 밤새 저어가서 날이 샐 무렵 친구 집 문전에 당도했다. 그러나 그는 무슨 생각에선지 친구를 부르지 않고 그 길로 돌아서고 말았다.
어떤 사람이 이상하게 여기고 그 까닭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흥이 나서 친구를 찾아왔다가 흥이 다해 돌아가는데, 어찌 꼭 친구를 만나야만 하겠는가."
흥이란 즐겁고 좋아서 저절로 일어나는 감정이다. 그러기 때문에 흥은 합리적이고 이해 타산적인 득실이 아니다. 그때 그곳에서 문득 일어나는 순수한 감정이 소중할 따름이다.
매사를 합리적으로만 생각하고 손익계산을 따지는 요즘 사람들은 눈이 내리는 날 밤을 새워 친구를 찾아 나선 그 흥겨운 기분과 마음을 삶의 향기로운 운치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때 만약 친구 집 문을 두드려 친구와 마주하고 담소를 나누며 아침을 얻어먹고 돌아왔다면, 그 흥은 많이 소멸되고 말았을 것이다. 시와 산문의 세계가 다른 점이 바로 이런 데에 있다.
왕희지가 서울을 떠나 시골에 있을 때다. 그전부터 환이(桓伊)라는 사람이 피리의 명인이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서로 만나지 못했는데, 때마침 수레를 타고 둑 위로 지나가는 그를 보았다. 왕희지는 이때 배를 타고 가던 중인데, 동료 중에 그를 아는 이가 있어 환이라고 알려 주었다.
그는 사람을 시켜 서로 알고 지내기를 바라면서 피리 소리를 한번 들려 줄 수 없느냐고 청했다. 피리의 명인인 환이는 평소 왕희지의 인품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는 즉시 수레에서 내려 의자에 걸터앉아 세 곡조를 불었다. 그리고 나서 급히 수레에 올라 떠나갔다.
이와 같이 나그네와 주인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피리 소리를 듣고 싶어하는 이에게 피리를 들려주고, 듣고 싶었던 소리를 듣는 것으로써 두 사람 사이의 교감은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었다.
피리를 불고 나서 번거롭게 인사를 나누지 않고 그대로 떠나간 환이의 산뜻한 거동이 피리의 여운처럼 우리 가슴에까지 울려온다.
전통적인 우리네 옛 서화에서는 흔히 '여백의 미'를 들고 있다. 이 여백의 미는 비록 서화에서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끼리 어울리는 인간관계에도 해당될 것이다. 무엇이든지 넘치도록 가득가득 채워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여백의 미가 성에 차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 걸음 물러나 두루 헤아려 보라. 좀 모자라고 아쉬운 이런 여백이 있기 때문에 우리 삶에 숨통이 트일 수 있지 않겠는가.
친구를 만나더라도 종일 치대고 나면, 만남의 신선한 기분은 어디론지 새어나가고 서로에게 피곤과 시들함만 남게 될 것이다. 전화를 붙들고 있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우정의 밀도가 소멸된다는 사실도 기억해 두어야 한다. 바쁜 상대방을 붙들고 미주알 고주알 아까운 시간과 기운을 부질없이 탕진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웃에게 피해를 입히게 되고 자신의 삶을 무가치하게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바람직한 인간관계에는 그립고 아쉬움이 받쳐 주어야 한다. 덜 채워진 그 여백으로 인해 보다 살뜰해질 수 있고, 그 관계는 항상 생동감이 감돌아 오랜 세월을 두고 지속될 수 있다.
등잔에 기름을 가득 채웠더니 심지를 줄여도 자꾸만 불꽃이 올라와 펄럭거린다. 가득 찬 것은 덜 찬 것만 못하다는 교훈을 눈앞에서 배우고 있다.
가난의 덕(德)을 익히자
(2000년 3월 30일 법정 스님의 명칼럼 중에서 이 구동 복사.)
요즘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난국은 성수대교의 붕괴처럼 하루아침에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벌써부터 예고된 현상이었다. 위기관리에 미숙하고 솔직하지 못한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부로 인해 지금 온 나라가 국제적인 수모와 수난을 겪고 있다. 이렇듯 엄청난 국가적인 파탄을 가져왔는데도 실질적으로 책임질 당사자나 주체가 없다니 그저 한심스러울 따름이다.
유한한 인간존재로 한정된 지구자원 아래서 무한한 경제성장을 추구하려는 생각부터가 그릇된 망상이다.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인과관계의 고리로 이어져 있다. 요 몇 해를 두고 우리 사회의 갖가지 행태를 유심히 지켜본 사람이라면 오늘과 같은 결과를 능히 짐작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국민소득 1만 달러의 문턱에서 그 씀씀이는 나라 안팎 가릴 것 없이 2만, 3만 달러를 넘었으니 이러고도 그 살림살이가 온전할 수 있었겠는가.
사람의 목숨을 이어주는 음식물을 아낄 줄 모르고 함부로 마구 버리면서 우리가 어떻게 복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 이 나라에서 하루에 발생하는 생활쓰레기 중 3분의 1이 음식물쓰레기로 버려진다. 이를 돈으로 환산하면 연간 약 8조원, 우리 나라 1년 예산의 15%라고 한다. 한쪽에서는 굶어 죽는 이웃이 수두룩한 데 목숨과 같은 음식물을 마구잡이로 버렸으니 이 어찌 복을 감할 일이 아닌가.
▼ 헤픈 씀씀이의 결과 ▼
음식뿐만 아니라 멀쩡한 의류나 가재도구도 새 유행을 따라 함부로 버리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가.
우리 분수에 넘친 소비 행태는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미국식 산업구조에서 비롯된 소비주의적 생활방식에 잘못 길들여진 폐습이다. 그 결과 삶의 기쁨이나 충만을 가져오기보다는 환경을 파괴하고 오염시키면서 사람이 설자리가 사라져 가게 되었다. 소비주의적 생활습관은 작은 것과 적은 것에 고마워할 줄도 모르고 만족할 줄도 모르게 한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물질적 생산과 소비의 증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인간과 자연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국민총생산과 같은 단순한 수량적 척도로 사회발전을 따지는 산업문화 속에서 인간은 하나의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끝없는 경제성장과 물질적 번영은 정신적인 빈곤과 심리적 불안정 그리고 생명력의 상실을 가져온다.
국민소득 7천 달러 시대로 후퇴했다고 다들 걱정하고 있지만 생각을 돌이켜보면 우리는 이제 제 자리로 돌아온 것 같다. 허세와 과시와 거품을 걷어내어 그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묻는다.
『오늘과 같은 어지러운 세상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합니까?』
스승은 이렇게 대답한다.
『어지러운 세상이야말로 살 맛 나는 좋은 세상 아니냐?』
▼ 적은 것으로도 만족을 ▼
오늘과 같은 고통과 위기 앞에서 우리는 우리 내부에 잠재된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면서 새롭게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상황에 새롭게 대처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6.25의 잿더미 속에서 맨주먹으로 일어선 불굴의 의지가 있다. 위기를 기회로 잡으라는 말도 이런 어려운 때 느슨하고 피폐된 민족의 기상을 다시 일깨우라는 교훈이다.
이제 우리는 새삼스럽게 가난의 덕을 익힐 때가 왔다. 주어진 가난은 극복해야 할 과제이지만 스스로 자제하고 억제하면서 선택한 맑은 가난, 즉 청빈은 삶의 미덕이다. 청빈이란 단순한 가난이 아니라 자연과 생명을 같이하고 이 세상의 모든 것과 조화를 이루면서 함께 살아감을 뜻한다. 자신의 생각과 의지로 선택한 간소한 삶의 형태가 곧 청빈이다.
풍요 속에서는 사람이 타락하기 쉽지만 맑은 가난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를 가져오고 건전한 정신을 지니게 한다. 오늘 우리 앞에 닥친 시련은 물질적인 풍요에만 눈이 멀었던 우리에게 자신의 분수를 헤아리게 하고 맑은 가난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그런 계기이기도 하다.
일찍이 이 땅에 살다가 가신 우리 선인들이 피땀 흘려 쌓은 음덕으로 오늘의 우리가 있듯이 이 다음 세대를 위해 지금의 우리도 음덕을 쌓아나가야 한다. 저마다 투철한 삶의 질서를 가지고 근검 절약해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생활습관을 익혀야 한다.
당신과 나, 한 사람 한 사람이 달라지지 않고서는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반드시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이런 신념이 곧 우리를 받쳐줄 것이다.
대선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에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혼신의 힘을 기울여 투표에 임해야 한다. 정부를 잘못 선택한 그 과오는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라
(2000년 4월 1일 법정스님 칼럼 중에서 이 구동 복사 편집함)
♣절에 봄이 찾아오니 꽃이 피고 새 잎이 돋아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도 새 잎을, 꽃을 피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가장 고운 빛깔과 향기로써 꽃을 피워야 합니다.
법구경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물을 대는 사람은 물을 끌어들이고, 활 만드는 사람은 화살을 곱게 만든다. 목수는 재목을 다듬고,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자신을 다룬다.'
또 이런 법문도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싸워 백만인을 이기기보다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 가장 뛰어난 승리자다.'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어떤 종교, 어떤 종파에 속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체가 아닌 부분입니다. 전체가 아닌 부분은 갈등을 낳습니다. 담을 쌓지 말고, 금을 긋지 말고, 내 것 네 것을 구분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절, 네 절을 따지지 않아야 합니다.
진정한 믿음의 세계는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바른 신앙 생활을 하려면 어디에도 예속되지 않아야 합니다. 본래의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인도에서는 쉰 살의 나이를 '바나 플러스'라고 합니다. 이는 '산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때'라는 뜻입니다. 오십 년의 인생을 살았으면 사회적인 의무를 다했으니 서서히 산으로 떠나갈 준비를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전통적으로 힌두교에서는 인생을 네 개의 주기로 나눕니다. 범행기(梵行期)는 스승의 집에서 경전과 고전 등 학문을 배우는 때이고, 가주기(家住期)는 집에 돌아와 결혼을 해서 세속적인 의무를 다하는 때입니다. 그리고 임서기(林棲期)는 숲 속에 들어가 수행하는 때이고, 유행기(遊行期)는 부부간에도 헤어져서 자기 완성을 위한 노력을 계속해 가는 생애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나이 쉰 살이 되면 세속적인 의무를 마치고 산을 바라볼 때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훨훨 짐을 다 벗어버리고 자기 몫의 삶을 챙길 때라는 것입니다.
명상하지 않는 종교는 맹신에 빠지기 쉽습니다. 광신자가 되어 어떤 믿음에 열광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자기 자신을 살피지 않고 겉도는 것입니다.
맹목적인 신앙은 무익하고, 무서운 것입니다. 종파적인 벽에 갇히면 파괴적인 힘까지 발휘할 수 있습니다. 종교성 자체는 본래 명상을 통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명상을 하지 않고 종교를 접하려는 것은 뿌리를 잊어버리고 가지를 뻗으려는 격입니다.
수십 년 절에 다니면서도 명상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입으로만 염불하지 그 정신은 왔다갔다합니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기 자신에게 귀 기울이고, 낱낱이 살피고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많은 주의력과 인내력과 집중이 필요합니다.
집중은 커다란 침묵입니다. 그 안에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바다와 같은 침묵이 담겨 있습니다. 절에 다니는 사람, 교회에 다니는 사람, 신앙인들은 말이 적어야 합니다. 말이 많으면 정신이 흩어집니다. 침묵이야말로 근원적인 세계입니다. 말을 적게 하는 것이 곧 명상의 입문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삽니까? 말을 하고 싶어도 참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덕이 됩니다.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말을 하면 그 말은 아무런 힘이 없게 됩니다.
침묵의 세계는 설득력이 있습니다. 가능한 한 불필요한 말을 하지 마십시오. 시시각각 침묵에 잠길 수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하루에 30분이나 1시간은 명상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침묵을 하든, 염불을 하든, 참선을 하든 그것을 간절히 행하면 그 안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성스럽고 영원한 것이 깃듭니다. 더없이 평화로운 무엇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래 마음입니다. 본래의 자기인 것입니다. 그 누구라도, 설령 부처라 해도 우리에게 깨달음을 줄 수는 없습니다. 부처의 제자가 인류 역사상 수만 명, 수억 명이지만 아무도 깨달음을 줄 수는 없습니다.
깨달음은 우리 안에, 우리 마음속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과일에 씨앗이 박혀 있듯이, 우리 마음속에 깨달음의 빛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그것을 찾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한다는 것은 깨달음의 씨앗을 키우는 일, 움트게 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갑자기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많은 인내를 갖고, 긴 시간 동안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언젠가는 씨앗이 싹을 틔우게 됩니다.
커다란 침묵과 하나가 될 때 내가 사라집니다. 내가 어디 있습니까. '나'라는 것은 따져 보면 아무 실체가 없습니다. 반야심경에도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나는 없습니다. 가공적인 것입니다. 몸이 있고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 작용이 있는 듯하지만 그 실체는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것에 불과합니다.
수레를 비유로 들면, 수레를 낱낱이 분해해 보면 거기 수레의 실체는 사라집니다. 바퀴가 있고, 굴대가 있고, 무엇 무엇이 있지만 해체해 보면 실체가 없습니다. '나'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없는 텅 비고 무한한 공간 속에 강물처럼 끝없이 흐르는 어떤 기운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자유가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자기 마음속에 지고 있는 갈등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갈등은 '나'라는 생각이 만들어 냅니다. 금강경에 보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모두가 '나'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자유롭다는 뜻입니다.
무엇엔가 집중을 하는 것은 현재를 최대한으로 사는 일입니다. 샤워를 하든, 요리를 하든, 청소를 하든 아무 잡념 없이 그 순간에 순수하게 집중하고 몰입할 때 그것이 삶을 최대한으로 사는 일입니다.
마음이 불안과 슬픔에 빠져 있다면 그는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시간 앞에 서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행하다는 것, 걱정 근심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지나간 일을 붙들고 있기 때문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살고 있습니다. 과거나 미래에 살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살고 있습니다. 과거는 이미 강물처럼 흘러가 버렸습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미래나 과거에 한눈을 팔면 현재의 삶이 소멸돼 버립니다.
현실을 회피한다고 해서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현실, 자신의 현재를 냉엄하게 들여다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자기 자신을 거듭거듭 살피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자기 자신을 다루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자신을 묻고 들여다보는 침묵 속에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빛이 있습니다. 이것이 지혜의 싹이고, 새롭게 열리는 문입니다.
옛 법문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불법을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배우는 것이요, 자기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일이다. 자기 자신을 잊어버림은 자신을 텅 비우는 일이고, 텅 비울 때 모든 것은 하나가 된다.'
내 마음의 문이 겹겹이 쌓이면 맞섬과 대립이 있고, 아무 생각 없이 마음의 문을 활짝 열면 대립이 없습니다. 이렇듯 자유로워졌을 때 진정한 자기 자신이 드러납니다. 개체인 자기에서 전체적인 자기로의 변신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나로부터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속성, 모든 이익과 얽혀 있는 나로 변신되는 것입니다. 질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자기를 비우면 하나가 되고, 하나가 되면 대립이 사라집니다. 어떤 것과도 대립하지 않을 때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고 본래의 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전체를 이루려면 개체가 무無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머니의 마음, 부처의 마음입니다. 그것이 자비이며 사랑입니다. 개체로부터 전체에 도달하는 일입니다.
부처의 마지막 설법인 남전 열반경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등불 삼고 자신에게 의지할 것이지 남에게 의지하지 말라. 법(진리, 가르침)을 등불 삼고 법에 의지할 것이지 다른 것에 의존하지 말라.'
우리가 착각하기 쉬운데, 불교는 부처를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자기 자신이 몸소 부처가 되는 깨달음을 이루는 자기 실현의 길입니다.
불교는 자기 탐구의 종교입니다. 자기 탐구의 과정에서 수많은 자신의 존재를 찾아갑니다. 개체의 자기를 탐구하다 보니 전체의 자기가 되는 것입니다.
초기 불교에서 자기 자신을 강조한 것은 자기로부터 시작하라는 뜻입니다. 자기로부터 시작해 이웃과 세상에 도달하라는 것입니다. 질적인 변화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질적인 변화를 통해서만이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갇혀 있으면 불교도, 종교도 아닙니다. 참 지혜란 함께 살고 있는 이웃의 존재, 전체의 존재를 찾아내는 따뜻하고 밝은 눈입니다.
이제 곧 부처님 오신 날이 다가옵니다. 그날이 무슨 날입니까. 등불 켜는 날입니다. 등불은 어둠을 밝히는 빛입니다. 사실 절이나 법당 앞은 어둡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렵게 사는 이웃을 위해 따뜻하고 환한 등을 밝혀야 합니다. 이것이 부처의 가르침입니다.
결식 아동이 전국적으로 1만 명이 훨씬 넘는다고 합니다. 일터를 잃은 사람도 늘고 있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이 곧 '자비의 등불'입니다. 어떤 바람에도 꺼지지 않는 '사랑의 등불', '지혜의 등불'입니다. 힘닿는 대로 부처의 제자된 자로서 이번 부처님 오신 날에는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자비의 등'을 많이 밝혀야 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행복을 배우자
(명사 명칼럼 중에서 이주 향의 글을 이 구동 복사 편집함 2000년 4월 3일)
영국 런던 정치경제대학에서 전세계 54개국 국민이 느끼는 행복도 조사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성공적으로 정착한 풍요로운 땅의 백성들은 행복하지 않고 자본주의가 ꡐ실패ꡑ한 땅이라고, 그래서 ꡐ구질구질한 인생들ꡑ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가난한 땅의 인생들이 행복을 안 다는 것이었다. 무엇일까?
넓은 아파트, 고급승용차, 전문직, 골프, 해외여행, 그럴 듯한 파트너…. 자본주의적 성공의 증거가 되는 전리품들이다.
그 전리품을 제대로 챙긴 인생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바쁘다 고. 바쁘다는 말이 인생을 성찰하는 유일한 말이고 유일한 자랑거리이기도 한 인생들에게 ꡐ성공ꡑ의 낙인을 찍는 체제, 그것이 자본주의다.
그런데 자본주의적 성공을 향해 한눈 팔지 않고 달려온 사람들 중에 성공을 얻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성공을 얻은 사람들, 성공을 얻기 위해 줄 서 있는 사람들은 과연 ꡐ행복ꡑ을 만날 수 있었을까? 그 점에서 얼마전 한 통계가 나왔다. 영국 런던 정치경제대학에서 전 세계 54개국 국민이 느끼는 행복도를 조사한 것이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방글라데시 나이지리아 인도 중국 터키 남아공 멕시코처럼 가난한 땅의 인생들이 행복을 아는 인생들이었고 반면 미국 일본 독일 스위스 프랑스 영국 등 잘사는 땅의 인생들은 행복을 만나기 힘들었다고.
어떠한 방법으로 조사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통계는 시선을 잡아끌 만큼 신선했다. 이에 따르면 행복은 자본주의적 성공과 단지 무관한 것이 아니라 반비례하는 것 아닌가!
자본주의가 성공적으로 정착한 풍요의 땅 백성들은 행복하지 않고 자본주의가 ꡐ실패ꡑ한 땅이라고, 그래서 ꡐ구질구질한 인생들ꡑ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가난한 땅의 인생들이 행복을 안다는 것이었다. 무엇일 까? 이 통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나는 혹시 자본주의 가치관이 불행한 것이고 반인간적인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을 했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이기심을 발전의 원동력으로 사용하는 체제다. 경쟁력만이 살길이라고 소리 높이면서 끊임없이 경쟁심리를 부추기는 그 체제는 이겨야 산다고, 이긴 자에게 돈과 명성을 경품처럼 제공한 다. 물론 오늘 이긴 자가 내일 이기리라는 보장은 없다. 경쟁은 숙명이 어서 숨이 붙어 있을 때까지 경쟁해야 한다.
자기 자리를 향해 달려오는 인생들을 오만하게 내려다보면서 성공한 인생이라고 자위하는 그 짧은 시간, 그 시간이 잠시 숨을 돌릴 때다. 숨을 돌리면 또 뛰어야 한다. 그 체제에 길든 사람들은 언제나 분주하고 분주하지 않으면 초조하다. 더 이상 경쟁력이 없는 인생이 되는 것 은 아닌지 하여.
무엇을 위해 그렇게 분주해야 할까? 전문가라는 명성, 시간이 없지 돈이 없지 않은 물질적으로만 풍요한 삶, 걸맞은 동료?
사실 부와 권력에 기대 사는 사람들은 불행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살 기 위해 많은 것이 필요한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도 경쟁의 고삐를 늦추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은 ꡐ성공ꡑ에 짓눌려 ꡐ성공ꡑ에 아부하는 사람들일 뿐이 라고 가뿐하게 보여주고 있는 사람들은 의외로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살기 위해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을 자본주의는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불렀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넓은 아파트가, 고급승용차가, 아침 7시의 원탁회의가, 영어를 위한 연 수가, 골프채가 필요하지 않은 이들은 그런 것들을 갖추기 위해 아등바등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그러니 죽이기 아니면 죽기 식의 경쟁체제에 길들지 않아도 되었고 그래서 체제경쟁에서는 지고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손가락질하는 그 가난한 인생들이 행복의 맑은 물 속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비추고 있다. 성장의 이름으로 경쟁의 이름으로 우리를 한 방향으로 몰이해온 자본주의적 무한질주가 얼마나 낯설 고 얼마나 기막힐 수 있는가를.
모든 게 경쟁력이라고 경쟁에 맞지 않는 꿈을 접고, 일류를 고집하고 대기업에 인생을 걸다가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 데를 되뇌어본 적이 없나? 시름을 달래기 위해 술을 마셔본 경험이 있나, 술 깨는 아침 여전히 맨 정신으로 기다리고 있는 장벽 같은 현실의 무게에 절망해본 적이 있나? 왜 우리는 ꡐ일류인생ꡑ이라는 낙인을 위해 평생 그 무거운 모범생의 철갑을 뒤집어쓰고자 했을까? 낙인만큼 구속인 것을.
남들보다 높은 곳에 앉아 있는 것이 성공이겠지만 높은 자리에서 추락하지 않기 위해 늘 안절부절못한다면 그 성공은 그저 높은 자리이기 때문에 성공이라고 불러야 할까? 혹시 아등바등하는 그 삶은 그저 불행한 삶은 아닌지!
부끄러운 인간 세상
(2000년 5월16일 충청 일보 사설에서 이 구동 복사 편집하다.)
사람의 목숨이 목숨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팔아 넘기고, 사람이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살인을 밥먹듯 하니 이를 어찌 사람의 목숨이라 할 수 있는가. 돈이 생기는 일이라면 어떤 몹쓸 짓도 저지르고 어떤 잔인한 행동도 서슴지 않는 세상이니, 어찌 이런 세상을 사람 사는 세상이라 할 수 있는가. 참으로 정 떨어지고 소름끼쳐 모골이 숙연해진다.
지난 9일 부산에서는 돈 5백만 원에 딸을 사창가에 팔아 넘긴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아비가 있었고, 그 이틀 전인 7일엔 서울 중앙병원 지하 주차장에서 회사 직원을 조문하고 나오던 현대종합상사 정 재관 사장이 괴한에게 피습 당한 일이 발생했다.
그런가 하면 지난 달 23일 대전에서는 보험금을 노리고 아내를 살해하려다 실패하자 옛 직장 동료와 애인 등 두 명을 살해한 일이 있었고, 중순경엔 열 달 동안 시민 17명을 연쇄 살해한 정 모라는 31세의 젊은이가 경찰에 붙잡혔다.
그리고 며칠 후인 25일엔 또 사람 넷을 연쇄 살해한 천 모라는 50대가 경찰에 붙잡혔다.
이들은 모두 돈 때문에 딸을 팔아 넘기고 사람을 죽인 인간 이하의 인간이다.
그러니까 이들에겐 돈이 딸보다 더 좋고 돈이 목숨보다 더 귀하다고 여겨 돈 앞엔 천륜이고 인륜이고가 없다고 믿는 반(反)인간적 비(非)인간들이다.
이 같은 현상은 빈익빈 부익부가 두드러지고 한탕주의식 주식투자로 일확천금을 하는 졸부가 늘어나면서 그 빈도수가 잦고 이게 마침내 굵직굵직한 대형 국책사업의 비리와 로비 의혹과 연관돼 상실감, 좌절감, 박탈감, 허무감을 배태해 범죄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이러니 어찌 가정이라고 편안하겠는가. 사회 윤리가 파괴되면 가정 윤리도 파괴된다.
아니 가정윤리가 먼저 파괴됨으로써 사회 윤리가 파괴된다.
한국 이웃 사랑회 전국 18개 어린이 학대신고센터에 접수된 상담 건수만 봐도 96년에 71건이던 것이 97년엔 1백59건이었고 98년엔 3백67건으로 늘어나더니 지난해엔 무려 1천1백49건으로 늘어났다 한다.
이는 다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가정이 파괴되고 사회가 파괴돼 가정과 사회가 모두 병들었다는 증거다.
다시 말하면 인성(人性)의 몰락과 윤리의 와해로 황금만능주의와 물질제일주의가 절대 가치로 자리 매김 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어찌 돈만 가지고 사는가. 사람이 어찌 밥만 먹고사는가. 가정이 건전하고 사회가 건강하려면 제일 먼저 황폐한 심성부터 고쳐 인간성 회복과 윤리성 회복운동이 전개돼야 한다.
지금은 사람 세상이라기엔 너무도 부끄러운 세상이다.
학교폭력 근절시키자
(2000년 5월 19일 충청일보에서 이 구동 복사 편집함)
우리가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 부르는 이유는 1년 중 가장 활동하기가 좋은 봄과 여름의 길목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5월에는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있어 가정의 소중함과 가족간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데다 스승의 날이 있어 가르침에 대한 존경과 고마움을 알게 해주는 그런 달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우리는 마음의 평화를 얻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사회는 매양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는 듯 사회일각에 자리잡고 있는 폭력을 외면할 수 없는 고충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진작부터 걱정을 해오던 일이었지만 학교폭력이 또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소식은 가정의 달에 듣는 또 다른 서글픔이기도 하다.
더구나 학교폭력은 피해학생이나 학교가 보복과 학교이미지 실추 등을 이유로 폭력사실을 은폐시키거나 축소하는 등 소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근절이 어려운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 학교 내에서도 사회의 폭력조직과 연계된 조직이 생겨나고 급기야는 거리낌없이 교 내외에서 둔기로 위협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등 학교 내 폭력이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때 사회폭력과 학교폭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자녀 안심하고 학교 보내기 운동」이 열띤 호응 속에 펼쳐져 학교폭력이 줄어드는가 싶었는데 그 열기가 식어졌고 사회분위기도 그 당시와 달라서인지 학교폭력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소식은 가정의 달 5월에는 듣고싶지 않은 소식임은 분명하다.
당초 「학교 안심하고 보내기 운동」이 벌어졌을 때 냄비에 물 끓듯 뜨거웠던 성원이 지금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전혀 느낄 수 없는 데다 그 동안의 변화가 또다시 폭력을 증가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폭력은 모든 것을 앗아갈 수 있다.
인간의 심성을 파괴하고 가정을 파괴시키는 원인이 될 수 있는 만큼 어떻게 해서든지 폭력을 근절시키기 위한 특별한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학교 내 폭력을 왜 근절해야 하는지를 재론한다는 것은 이 시점에서는 시간 낭비가 된다고 생각한다.
학교폭력이든 다른 폭력이든 근절하겠다는 의지만이 필요한 때이다.
교편(敎鞭)의 위력이 되살아나고 폭력은 자신은 물론 남도 황폐화시킨다는 깨우침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 보다 강제적이라도 근절시켜야 할 이유는 그게 바로 우리의 일이기 때문이다.
경제시련 끝나지 않았다
(2000년 5월 19일 이 구동 충청일보에서 복사 편집함)
우리 경제가 안팎으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다. 유가, 환율, 원자재 가격, 물가 등의 불안이 심상치 않고 기업의 구조조정 및 노사관계도 구조조정의 결실을 보기 전에 도전에 직면해 있다. 자칫 제2의 위기 가 닥칠 수 있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우선 IMF 이후 우리 경제에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해왔던 무역흑자 기조가 흔들리고 있다. 수출 증가세는 30%인데 반해 수입 증가세는 50%를 넘는다. 지난 4월말까지 무역수지 흑자는 고작 7억7천만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친다. 이대로 가다간 내년 엔 무역수지가 적자로 돌아선다는 비관적 견해도 표출되고 있다. 반면 무역수지가 급격히 악화되고 있는 데도 소비재 수입은 오히려 늘고 있고, 해외여행객도 급속도로 늘고 있어 위기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일제 전기밥솥과 VTR 등의 반입은 300% 이상 폭증했고 1분기 포도 주 수입 167%, 바닷가재 109%, 스키용품 233%등 사치성 소비재 수입이 IMF 이전 수준을 돌파한 지 오래다. 여기에다 해외여행객 수도 3월 현재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4%나 올라 요즘 해외여행 항공기 잡기가 쉽지 않다니 겉으로 보기엔 이미 우리는 IMF 상황을 벗어나 흥청 망청이다.
최근 무디스사는 우리 경제에 의미 있는 보고서를 내놓은 바 있다 . 한국 경제가 구조조정을 게을리 했다간 또다시 경제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경고였다. 확실히 지금 우리 경제는 총선 이후 뭔가 나사 가 풀린 느낌이다. 더 늦기 전에 경제 주체가 위기의 실상을 깨닫지 않으면 안될 시점이다. 정부는 정책에 일관성을 유지해야 하고 기업 은 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해야 하고, 또한 국민들도 근검 절약하는 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지금이 어느 땐가.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매도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걱정이다.
물가안정 및 금리안정, 노사관계 등 어느 것 하나 쉬운 상대가 없다. 이 상황에서 경제 주체 모두가 IMF 초기 마음으로 되돌아가지 않고서는 국가적 위기를 다시 맞는 비극을 자초할 뿐임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결코 흥청거릴 때가 아니다.
며칠 전에 남도를 다녀왔다. 섬진강 변에는 매화가 구름처럼 피어 있었다. 경제적인 불황과는 상관없이 이 땅의 여기저기서 꽃이 피어나고 있다. 봄은 남쪽에서부터 꽃으로 피어나고, 겨울은 북쪽에서부터 눈으로 내린다. 그 어떤 세월에도 어김없는 이런 계절의 순환이 우리를 받쳐주고 있다는 사실이 든든하게 여겨졌다.
이와 같은 순환은 자연계의 질서일 뿐만 아니라 인간사회에도 적용된다. 한쪽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순환인데 반해서 다른 한쪽은 인위적인 순환이다. 지금 우리 앞에 닥친 국제통화기금(IMF) 한파는 밖에서 휘몰아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우리들 스스로가 불러들인 인위적인 재난이다. 그러니 세상일은 우연히 되는 일도 없고 공것도 없다. 모두가 뿌려서 거둔다.
한심스런「정치 꾼들 작태」
수많은 사람들이 일터에서 밀려나 그 가족들과 함께 살길이 막막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날마다 이어지고 있는 절박한 현실이다. 그런데도 국민의 세금으로 번쩍거리면서 지내고 있는 이 땅의 정치꾼들은, 내가 옳네 네가 그르네 하면서 수렁에서 벗어날 줄을 모른다. 실로 한심스러운 작태다.
사람의 마음은 항상 무엇엔가 사로잡히면 평온하지 못하다. 마음이 아무 것에도 사로잡혀 있지 않을 때에만 자유로울 수 있고, 그때 그 마음은 본래의 평온을 되찾을 수 있다. 기왕에 쥐었던 권력을 잃었다고 해서 너무 연연해서도 안되고, 새로 얻었다고 해서 함부로 휘둘러서도 안 된다. 잃은 쪽이나 얻은 쪽이나 순환의 질서 앞에 겸허해야 한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어디 있는가.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을 우리는 익히 들어왔다. 당리당략에만 혼을 빼앗겨 민심을 잃는다면 그런 정당은 미래가 없다. 집안에 불이 났으면 모두가 나서서 함께 불을 끄는 일이 시급한데, 네 탓 내 탓을 따지기만 한다면 어떻게 불이 꺼지겠는가.
우리 시대에 정권이 바뀐 것도 민심에서 싹튼 순환의 질서로 보아야 한다. 말이 없던 민중이 선택한 순환의 질서다. 그래서 말없는 민중을 두려워하라는 것이다. 요즘의 정치적인 혼미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 민중은 머지않아 있을 지방선거에서 순환의 질서를 다시 한번 보여줄 것이다. 정치 꾼들은 이런 민중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집권 여당은 지나간 정권에서 저질러진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 순리를 벗어난 무리수를 써가면서 강행한 그 폐해를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제는 이끌어 가는 입장이니 자만하지 말고 한 걸음 물러설 줄도 아는 아량과 여유를 지닐 수 있어야 한다.
어려운 결단이겠지만, 총리인준 문제로 정국이 꼬여 안 풀리면 차선책을 쓸 수도 있어야 한다. 물론 여기에는 당사자의 지혜로운 선택이 따라야 할 것이다. 눈앞 일로만 보면 첫 라운드에서 참패하는 것 같겠지만, 긴 안목으로 보면 지는 길이 곧 이기는 길이다. 나라 일이 위급할 때 자기 한 몸을 희생할 줄 아는 그 도량과 용기가 ꡐ서리ꡑ라는 가시방석보다 훨씬 명예로울 것이다. 이 또한 정치적인 역량으로 평가될 것이고, 이 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의 현명한 전술일 수도 있다. 왕년의 집권 여당에서 현재의 야당으로 물러앉은 한나라 당은 권력의 덧없음을 실감했을 것이다.
학교발전 기금 페지하라
(2000년 5월 20일 한국일보 사설 중에서 이 구동 복사함)
학부모단체와 교원․시민단체들의 학교발전기금 거부운동에서 느끼는 것은 우리 교육이 50년대로 멀리 되돌아가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교육예산의 큰 항목인 학교운영비를 학부모에게 의존하겠다는 발상이니, 교육정책은 언제까지 거꾸로 가겠다는 것인가.
학교발전기금․찬조금․체육진흥비 따위 갖가지 잡부금의 거부운동을 벌여온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등 교육관련 아홉 단체는 18일 어떤 명목의 잡부금도 거부하겠다는 학부모 행동지침을 발표했다. 참교육학부모회는 대다수 학교에서 불법적으로 잡부금을 거두고 있다는 자체조사 자료도 공개했다.
서울시내 12개 초․중․고교, 울산시내 16개교를 대상으로 실시한 표본조사 결과를 보면 모든 학교에서 교구와 학습기자재 구입, 시설확충, 도서구입 등을 이유로 돈을 거두었다. 모금액수는 학교별로 차이가 있지만, 운영비의 60~70%를 발전기금에 의존하는 곳도 있다. 서울 강남 같은 곳에서는 연간 모금액이 1억원 이상인 학교도 있어 1인당 부담이 17만원을 넘었다.
모금도 반강제적이다. 가정통신문이나 기탁서를 보내고 교장․교감이 학부모들에게 직접 종용하거나, 학급임원에게 몇십 만원씩 할당하는 사례도 있다. 발전기금 용도는 사소한 교구 구입과 냉난방 시설, 학교급식용 승강기 시설까지 다양하다. 국가예산으로 충당해야 할 비용을 학부모들에게 떠넘기는 일은 국가경제가 극히 피폐했던 지나간 시절 ꡐ사친회비 시대ꡑ를 떠올리게 한다. 불요불급한 시설을 위한 모금도 많아 더욱 배경이 의심스럽다.
지금은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을 시행하는 시대이므로 학교발전기금 제도는 어떤 명분으로도 존속되어서는 안 된다. 이 제도는 구제금융(IMF) 시대에 크게 삭감된 학교운영비를 메우려던 고육지책이었다. 교육청들이 명퇴교사 퇴직금 등 늘어난 인건비를 충당하기 위해 학교운영비를 편법전용, 예산이 고갈되자 교육법을 개정해 기금모금 근거를 만들어 3년째 시행중이다. 그러나 모금액 할당이나 직․간접적인 납부요구, 납부 희망액 조사나 기금납부서 일괄배부 등의 행위는 엄격히 제한돼 있다. 따라서 강제성을 띤 모금은 불법이다.
이번 소동은 획기적인 교육재정 확충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 열악한 교육환경이 초래한 과외수요의 급증, 교실붕괴 현상 등으로 교육에 대한 불신이 분출하고 있는 때에 잡부금마저 기승을 부린다면 학교교육 바로 세우기는 영원히 불가능하다. 전근대적인 제도를 즉각 폐지함으로써 학교에 대한 국민의 믿음부터 되찾게 하는 일이 시급하다.
금융시장 안정시키려면
(2000년 5월 20일 경향신문 사설에서 이 구동 복사 편집함)
금융시장의 불안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주식시장은 뚜렷한 매수 세력이 없고 투자심리가 일어나지 않아 연일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금리는 저(低)수준을 유지하기에는 버거울 정도로 상승압력을 받고 있으며 환율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금융시장 불안은 최근의 여건 변화에 비춰볼 때 결코 예사롭게 넘길 일이 아니다. 우선 미국의 금리인상으로 시장이 적잖게 흔들리고 있다. 달러화의 강세는 외국인들의 이탈을 부추겨 매수기반을 위축시킬 가능성이 크다
. 이런 현상은 태국과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국가들에서 외환위기 조짐이 나타나면서 이미 가시화하고 있다.
달러강세는 또한 엔화약세를 불러 수출상품의 가격경쟁력을 떨어뜨리고 결국 교역여건을 악화시키게 된다. 우리 경제는 치솟는 원유가를 감당치 못해 고전하고 있는 마당에 엎친 데 덮친 격의 충격을 받게 된 셈이다. 지난 해는 미국 금리와 유가가 올라도 원화 강세로 상쇄할 수 있었으나 올해는 원화 환율이 상승세를 나타내 대응책을 찾기가 쉽지 않다.
지금은 이런 외부의 악재를 희석시킬 만큼 믿을 만한 금융정책이 절실한 때이다. 시장의 관심은 온통 정부가 대우사태로 생겨난 수십 조원을 포함해 곳곳에 널려 있는 부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쏠려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명쾌한 부실 해소 책을 제시하고 이를 시장에 납득시켜야 한다. 투자자들이 앞날을 긍정적으로 보면 외부의 악재가 쏟아져도 시장은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그 동안 정부가 발표한 시장관련 정책은 극히 미흡하다. 주식시장을 떠받치는 한투․대투 등에 대한 구조조정 계획마저 신통한 반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연말까지 20조원이면 충분하다는 공적자금 조달계획은 오히려 불신을 가중시킨 감이 든다. 정부는 어제 증시 안정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국내 증시가 기업들의 내재가치를 반영하지 못하고있다는 펀더멘털론ꡑ외에는 뾰족한 방안을 내놓지 못했다. 주가가 급락할 때마다 제시했던 증시대책이 한번도 실효를 거두지 못한 터라 더 이상 대중요법
에 의존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다른 방법이 없다. 투자자들이 시장의 앞날을 예측할 수 있게끔 신뢰할 만한 정책을 펴고 이를 적극 실천하는 자세를 보여줘야 한다. 실물경제가 튼튼한데 쓸데없는 경제 위기론이 나와 위기를 조장하고 있다는 불만은 시장을 안정시키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부가 경상수지 흑자를 늘리는 데 최선을 다하고 빈틈없이 구조조정을 추진하고 있다는 확신만 줘도 금융시장의 불안은 금방 사라질 것이다.
공직자의 도덕성
(2000년 5월 20일 문화일보 사설 중에서 이 구동 복사 편집함)
박태준 총리의 재산은닉사건은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사건이다. 비록 과거의 일이긴 하지만 일 국의 총리가 각종 공직을 이용해 각종 방법으로 치부하고, 그렇게 번 돈으로 부동산을 매입하고, 그것도 여러 사람 이름으로 명의 신탁해 은닉하고, 그 은닉부동산을 임대해 돈을 벌고있다는 사실, 우리는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어느 특정인 개인의 도덕성의 문제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공직사회에 내재한 부패구조가 표출된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 이렇든 저렇든 참담하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박 총리는 민자당대표시절인 92년 대선 당시 김영삼(YS)후보측에 맞섬으로써 정치적․사법적 핍박을 받았고, 오늘 문제가 되고있는 것도 대부분 당시 뇌물 수수 등 혐의로 까발림을 당해 나온 것이다. 까발림을 당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또 까발림을 당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떤가. 특정개인을 예로 공직사회 전체를 매도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까발려지지 않은 수많은 공직자들이 모두 깨끗하고 모범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이 공직사회의 문제다.
공직자는 명예와 봉사정신을 먹고살아야 한다. 그러도록 하기 위해 정부는 연금 제도 등 민간사회에는 없는 안전장치도 해주고 있다. 그런데도 돈을 먹고사는 공직자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보고 또 느낀다.
개발시대의 부패구조가 아직도 살아 있다. 박 총리 사건이 총리직 사퇴 등 개인적 일로 끝나서는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 공직사회는 현직총리가 관련된 이 사건을 계기로 공직이 무엇이고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나은 공직사회가 된다.
SOFA개정, 한시가 급하다
(2000년 5월 20일 문화일보 사설 중에서 이 구동 복사 편집함)
주한미군의 ꡐ횡포ꡑ로 인한 반미(反美)감정이 크게 고조되고 있다.이전에도 반미시위 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매향리 오폭 사건을 계기로 확산되고 있는 작금의 ꡐ반미 열기ꡑ는 사뭇 우려할 만하다. 과거ꡐ반미ꡑ가 주로 대학생들의 외침이었다면 지금의 ꡐ반미ꡑ는 일반 시민들까지도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 전통적으로 선린․우호관계를 유지해온 한․미 두 나라를 위해 불행한 일이다.
특히 분단 이후 최초의 역사적인 정상회담과는 별개로 남북한간에 여전히 적대관계가 청산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자칫하면 우리 안보의 기본 축인 한․미 동맹체제를 흔들지도 모르는 이 같은 사태진전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한국에 전략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미국으로서도 바람직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가장 효과적인 해답은 한․미 주둔군 지위협정(SOFA) 개정이다.SOFA는 누가 봐도 불합리한 불평등협정일 뿐더러 반미감정의 주 요인이랄 수 있는 주한미군의 횡포를 가능하게 해준 원천이기 때문이다. 새삼스럽게 그 내용을 다시 들출 필요도 없다. 매향리 사건만 해도 주민피해가 확인되면 배상을 전액 미군이 하지 않고 25%는 한국정부가 떠맡게 돼 있다. 미군이 공무집행 중 가한 손해나 법률상 책임을 지는 손해에 대해 한국정부가 배상금의 25%를 분담하도록 SOFA에 규정돼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불합리한 일이 어디 있는가.
이에 따라 그간 SOFA가 안고 있는 각종 문제점과 개정의 필요성은 끊임없이 거론돼왔다. 그러나, ꡐ특혜ꡑ를 넘어, 심하게 표현하면 마치ꡐ점령군ꡑ같은 우월적 지위를 유지하려는 시대착오적인 미국의 인식과 한국정부의 소극적인 자세로 인해 번번이 개정은 무산됐다. 지난 2월 발생한 미군 병사의 술집 여 종업원 살해사건을 계기로 지난달 말 개정협상을 재개하기로 한 양국간 합의 역시 아직껏 지켜지지 않고 있다.
일부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ꡐ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양국간 안보분야 협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ꡑ는 논리를 내세워 SOFA 개정 협상을 계속 미루려 하고 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렇다면 이 논리야말로 잘못된 것임을 미국은 깨달아야 한다. 양국간 안보협력은 한국 국민의 반미감정이 확산되는 한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오히려 SOFA 개정을 통해서만 더욱 공고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정빈 외교통상부 장관은 19일 늦어도 2주안에 협상을 재개하겠다고 밝혔지만 또다시 빈말이 돼서는 안 된다.
드디어 '노예매춘'까지...
(2000년 5월 20일 세계일보 사설 중에서 이 구동 복사 편집함)
드디어 '노예매춘'이라는 용어까지 등장했다. 매춘 형태가 그만큼 지능화-잔혹화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매춘의 만연뿐 아니라 그 행태의 반(反) 인륜성으로 볼 때 우리가 인권국가로 자처한다는 게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서울 경찰청이 지난 한달 동안 적발-검거한 378명의 매춘 실태가 이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매춘의 세계에는 최소한도의 인권도 발붙일 수 없게 된 셈이다.
경찰에 검거된 범죄조직과 유형에는 윤락 소개업자, 윤락 업자는 물론 인신 매매범, 탈출윤락녀 체포단 까지 가담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적어도 이들의 범법 행태로 미루어 보면 과연 우리의 공권력이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직업소개소를 찾아온 부녀자를 윤락가로 팔아 넘기는 일은 새삼스러운 건 아니다. 하지만 감시카메라를 동원해 윤락녀들을 24시간 감시하고 대형냉장고를 밀실로 꾸며 위장하는 등의 수법에 이르면 말 그대로 '노예매춘'이라는 용어를 실감하게 된다.
'윤락녀 한 명을 고용하는 것이 택시 한대를 운영하는 것보다 훨씬 수익이 좋다'는 윤락업계의 통설(通說)은 바로 매춘이 기업화하고 있다는 뜻이다. 윤락업계가 노예시장처럼 운영되는 것은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도 남는 장사가 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매춘업계에도 철저한 시장원리가 적용되고 있는 셈이다. 매춘의 만연은 항상 매춘 수요에 비례한다. 따라서 매춘의 만연과 그 극단적 행태는 바로 도덕-윤리성의 마지노 선마저 해체되고 있는 듯한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기류와 무관할 수 없다.
매춘의 근절은 사실상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매춘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똑같은 논리로 매춘의 근절을 위한 사회적 노력은 끊임없이 지속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눈에 나타나는 윤락가에 대한 강제적 해체만으로 매춘을 줄이기는 어렵다. 교묘한 방식의 음성적 매춘이 주택가를 비롯한 도처에서 성행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다. 문제는 정부 차원의 정책적 의지다.
우선 매춘업주를 발본색원해야 한다. 매춘조직의 해체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악덕업주의 지능적인 윤락행위도 당국의 강력한 법 집행 의지 앞에서는 껍질을 벗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정부가 인권 사각지대를 없애겠다는 강력한 의지만 갖는다면 매춘행위를 훨씬 줄여 나갈 수 있다. 악덕업주와 이를 비호하는 공무원의 유착관계를 차단하는 일은 필수적이다. 특히 매춘시장에서 19세미만의 미성년과 아동의 매매춘 현상이 급속하게 확산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는 7월부터 발효되는 '청소년 성 보호에 관한 법률'을 철저히 시행해야 할 것이다. 청소년의 성을 사고 파는 행위를 한 모든 사람의 명단공개는 이제 불가피하다. 정부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매춘과의 전쟁을 벌여야 할 때다.
신문 읽기의 지겨움
이제 신문을 읽기 시작한 지 근 20년이 다 되어간다. 처음 내가 신문을 읽기 시작한 것은 아침 신문을 찾는 아버지가 신기해서
였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은 아버지가 매일 아침 읽으시는 저것은 무엇일까. 초등학교 때 아버지 흉내를 내어 읽기 시작한 신문에서 내가 제일 먼저 ꡐ매일 읽기ꡑ 시작한 것은 TV프로그램 편성표였다. 그때는 신문을 읽는 맛이 있었다.
신문은 TV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세상에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저녁 시간에 뉴스 프로그램에서 본 내용을 다음날 아침, 아직 덜 마른 잉크냄새가 풍기는 신문으로 보는 것은 색다른 맛이 있었다.
이제 나는 그렇게 즐겁게 신문을 읽지 못한다는 사실을 고백하려고 한다. 하루하루 사회면을 장식하는 끔찍한 내용들도, 어느 정도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의무감에 읽기는 하지만, 우리와 상관없는 ꡐ그들만의 세상ꡑ을 반복 재생산하고 있는 정치면이나 경제면도 지겨울 따름이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TV․연예 면은 스타들의 그저 그런 이야기들로 넘쳐나고 있다.
나만 신문을 읽기 지겨워하는 것은 아닌가보다. 몇 달 동안 신문을 안 읽어도 살아가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는 친구들, 신문을 구독하라고 사람이 오면 ꡒ종이 쌓이는 게 싫어서 안 본다ꡓ고 대답하고, 가끔 각 신문의 홈페이지나 클릭해 본다는 친구들. 차라리 TV나 영화를 안 보면 모를까, 신문을 안 본다고 세간 화제에 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람들. 이 점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미디어 혁명의 큰 흐름의 한 현상일까.
아니면 사람들이 신문이라는 올드 미디어에 대한 기대 자체를 저버린 것일까. 곧 생각해 볼 일이지만 ꡐ딴지 일보ꡑ가 처음 세상에 등장했을 때의 그 열광적인 반응을 생각해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혹자는 ꡐ인터넷 언론ꡑ이라는 것이 신기한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그렇다면 ꡐ딴지 일보ꡑ의 기사가 책으로 묶여 나왔을 때 베스트 셀러가 되었던 것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ꡐ딴지 일보ꡑ의 기사가 단순한 시의성과 일견 경박해 보이는 풍자 이외의 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바로 언론이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ꡐ자기 목소리ꡑ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런 신문이 보고 싶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흠 잡힐 것 없는 사실 보도만 하는 것이 아닌, 논쟁이 될 수 있는 부분을 과감히 찔러 들어 오는 신문. 여론을 보도하는 것이 아닌, 여론을 이끌어낼 수 있는 신문. 하는 일이 하는 일이다 보니 특히 내가 아쉬움을 느끼는 것은 국내 일간들의 문화지면이다. 한국 신문의 문화면은 너나 할 것 없이 너무 얌전하다. 문화계 인사들이 문화적인 현상에 대해 의견이 없을 수 없는 일이고, 그의 견들이 때로는 대립하고 맞부딪치면서 치열한 논쟁거리를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논쟁거리는 어쩌다 한 번씩, 가뭄에 콩나듯이 나온다. 근 10년 동안 기억나는 신문지상의 논쟁은 딱 두 가지인데, 하나는 90년대 초반의 김윤식-이문열 논쟁이고, 또 하나는 복거일씨의 영어 공용화론을 둘러싼 논쟁이었다.
그러나 설마 10년 동안 그 두 가지 외에는 논쟁이 될 만한 것이 없었던 것이었을까. 술자리에서, 사석에서 뒷공론으로만 피어났다가 사라졌던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이것은 신문에만 탓을 돌릴 일이 아닌 것은 물론 안다. 자기 이름을 내걸고 하기에는 품위가 떨어진다고 생각해서, 골치 아픈 논란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 입다물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하지만 내가 신문에서 기대하는 것은 그런 ꡐ논란거리ꡑ인 것이다.
요 몇 년 새 대부분의 신문에서 젊은 감성을 표방한 섹션을 만들었다. 동시대적인 감성을 포착하겠다는 열의야 언제나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젊은 감성이란 요즘 젊은이들이 입는 옷과 먹는 음식과 듣는 음악과 보는 영화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꺼내놓는 이야기. 유치하든, 공격적이든, 비사회적이든 이런 것들을 신문이 소화할 수 있을 때 그 신문은 정말 젊은 신문일 것이다.
<송 경아씨는 소설가>
조상들의 더위 나기
(김 명자 | 안동대 민속학과 교수)
뒤꼍으로 난 대청 문을 활짝 열어 젖히면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던 우리네의 옛 가옥. 이런 환경에서 더위를 피하기 위해 다른 방법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 나라의 여름은 이것만으로 더위를 나기에는 모자랐다.
예전에는 우선 인구가 적고 더위를 가중시키는 온갖 공해 요소가 거의 없었을 테니 더위를 피하는 방법도 한층 여유가 있음직 하다. 우선 부채로 더위를 식히고 삼베나 모시와 같은 천연섬유의 시원한 옷감으로 옷을 지어 한 여름을 보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대형 냉장고라고 할 수 있는 석빙고에 음식을 저장했던 것은 과학적이면서 운치가 있었다. 조선시대 서민들의 여름 나기는 신윤복의 풍속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자들이 그네를 뛰고 냇가에서 목물하며, 남자들은 씨름을 즐기거나 천렵(川獵)하는 모습은 아마도 당시 서민들의 피서 풍속으로 보인다.
선조들의 더위 나기는 세시명절에 행해지는 세시풍속을 통해 추정해 볼 수 있다.
전통적인 여름 명절이라면 단오와 유두, 그리고 복날 등을 들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유두와 초복과 중복 무렵은 한 여름이다. 유두일은 음력 6월 보름이다. 요즘 사용하는 양력 역법으로는 7월 중순 무렵이니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다. 유두는 동류수두목욕(東流水頭沐浴)의 약자로 ꡐ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고 목욕하면 부정이 가신다ꡑ는 뜻을 지니고 있다. 동류수(東流水)에 머리를 감는 까닭은 동방(東方)이 청(靑)으로 양기(陽氣)가 왕성한 방향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물로 몸과 마음을 통해 정화하는 날이 유두였다. 이 날 약수로 머리를 감으면 부스럼을 앓지 않는다 하여 여자들은 약수를 찾았고 산이나 계곡에서 폭포처럼 쏟아져 내려오는 물밑에서 물맞이를 했다. 약수터에서 노구메를 드리기도 한다. 노구란 놋쇠로 만든 작은 솥을 말하며 메는 밥, 노구메 드린다는 것은 노구솥에 밥을 지어 올리며 기원한다는 뜻이다.
가정의 평안과 가족의 건강을 위해 물가에서 고사를 지내고, 물맞이를 하며 더위를 식혔던 것이다. 복날 역시 유두 못잖은 명절이었다. 초복․중복․말복을 합쳐 삼복이라고 하는데 이 기간은 가장 더울 때다. 그래서 삼복 더위란 말이 있다. 삼복 더위란 멀리서 서서히 밀려오려던 가을 기운이 불같은 더위에 녹아 끽 소리도 못하고 잠복하는 날이란 뜻이다. 이 더위를 이기기 위해 물가에서 복놀이를 즐긴다. 물맞이를 하고 냇가에서 천렵한 물고기로 그 자리에서 국을 끓여 먹으며 이열치열로 더위를 다스리며 몸을 식혔다. 이를 복대림, 또는 복다림이라고 한다.
양반들의 탁족회(濯足會) 역시 더위 나기 방법의 하나였다. 탁족(濯足)은 글자 자체 풀이로는 ꡐ발을 씻는다ꡑ는 뜻이다. 원래 탁족회는 여름철에 선비들이 산수가 좋은 곳을 찾아다니며 발을 씻고 노닐던 모임이었다. 그러나 단순히 노는 것이 아니라 물 속에 발을 담그고 시를 지어 낭송하는 등 ꡐ자연과 학문의 만남ꡑ을 마련했다. 그러나 후대에 와서는 물놀이로의 성격이 강해졌다. 한 여름이면 모기가 기승을 부리고 무더위에 바람마저 덥다. 마당에는 소나무나 참나무로 모깃불을 피워 놓고 양반 남자들은 죽부인을 통해 더위를 달랬다. 죽부인은 잘 마른 황죽을 참숯에 지져서 엮어 만든 취침 용구다. 무더운 여름철 사랑방에 기거하는 선비는 잠자리가 불편하면 이 죽부인을 활용한다. 죽부인을 가슴에 품고 한 다리를 걸치고 자면 허전함을 덜 뿐 아니라 솔솔 스며드는 시원한 바람에 저절로 숙면하게 된다. 비록 대나무로 만든 ꡐ인공부인ꡑ이지만 아버지가 사용하던 것을 아들이 사용하지 않는 것이 예의이다.
요즘 무더운 여름철이면 으레 바다로 바캉스를 떠난다. 바캉스라는 용어가 지난 1970년대부터 우리 나라에서 유행하여, ꡐ여름휴가ꡑ는 마치 서양문화로 생각한다. 하지만 여름 바캉스는 단순히 서양문화가 전래 되었다기 보다는 유두나 복날의 물맞이 행사? 등의 풍속이 변용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김 명자님은 현재 안동대학교 민속학과에 교수로 재직 중, 안동대 박물관장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