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궈가꾸는 마음밭!

불효자식은 울 뿐, 아무리 반성해도 유부족입니다.

마징거제트 2009. 8. 25. 22:22

어머님! 어머님! 우리 오남매의 도태식(都泰植) 어머님!

 

  2008년 7월 16일 오후 5시 “어머니!” “어머니!” 라고 아무리 불러도 대답을 잘 못하시는 모습을 보고 온몸이 떨리고 눈물이 나도 모르게 줄 줄 줄 쏟아져 나올 뿐이다.

 

 구미에서 대구로 달려가는 차가 오늘은 왜 그리 더디게만 가는지... 파티마병원이 목적지이니 나는 팔공산 인터체인지를 통과할 예정으로 달리고 있었다. 우심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시계를 본 시각은 벌써 4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다급한 우심의 목소리는 영대병원으로 갈 터이니 그리로 오란다. 그래서 나는 급히 북부인터체인지로 목표를 바꾸고 신천대로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하늘도 무심치는 않았는가 보다 오늘따라 그렇게 어머님이 보고 싶고 고향에 가고 싶고 하더니 이런 비보가 들려오다니!

 

 구미로 직장을 옮기고부터는 정말 어머님을 자주 뵙지도 않고 대화도 나누고 보살펴드리지 못한 죄스러움을 온몸으로 느낀다. 너무나 죄스럽고 도리를 다하지 못해 늘 부끄럽고 안타까웠다. 아무리 반성해도 가치 없는 후회이구려...

 

 누나의 다급한 목소리 “야야! 엄마가 심근경색이란다.”(사실은 영대병원에서 MRI촬영 결과 뇌졸중 증세였음) 정말 어처구니없는 얘기다. 우리 어머니가 그럴 수가! 부처인 우리 어머니가! 그런 상황을 맞을 리는 없을 것이란 생각이 늘 머리에 꽉 차있는데도 말이다.

 

 예측이 간다. 틀림없이 메스컴에서 폭염주의니 경보니 아무리 떠들어도 우리 어머님은 아랑곳 않았을 것이고 걱정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마당에 가꿔놓은 배추랑 무랑 파랑 오이랑 딸기랑 배나무 감나무 모과나무 매실나무 등등을 자식 보듯 늘 보살피는 그 맘이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자기 몸은 생각지도 않으면서 자식들 손자들로부터 전화라도 오면 급하게 숨을 몰아쉬시면서 방에 헐레벌떡 뛰어들어서는 “누고?”부터 시작, “얘들아! 나는 괜찮다.”, “너들은 건강하게 잘 지내느냐?”고 자식들 손자들 걱정을 늘어놓고 부탁을 하신다. 전형적인 한국의 부모들이 하시는 태도이고 자세이시다. 어떨 때는 내 걱정은 손톱만큼도 하지 말란다. “내야 인자 밭고랑에 넘어져도 천당이고, 논두렁에 넘어져도 천당이고, 차타고 가다 쓰러져도 천당이라신다. 하지만 우리도 이제 자식 키우고 장가보내고 부모 되어 심정을 조금이라도 알게 되어 작은 효도라도 제대로 실천 한번 하지 못한 후회를 되새겨보지만 어머님은 이제 저렇게 노약해지시고 모든 것을 다 주고 더 줄 것이 없는 상황에까지 가시도록 되어버렸다.

 

 영천군 청통면 은해사 옆 애련동(상계)에서 성주 도씨 가문에 6남매의 맏이로 태어나 정말 맏이 구실 톡톡히 하는 모습을 우리들이 힘들면서 늘 지켜보았다. 어머님이 자주 하시는 말씀 “내가 17살에 이씨가문에 시집와서 이제 90 가까이 살았으니 참 많이도 살았지?”, 1920년대 놀랍게도 낭산선생님으로부터 한글도 배우고 붓글씨도 틈틈이 익히셨던 우리 어머님! 가정의 전통적인 법도도 누구 못잖게 배워 익혔고 많은 친정 동생들 일일이 챙기면서 어느 한 동생에게도 편애하지 않고 보듬고 돌보셨던 어머님이시다. 그 형제간에 다져진 우애하며 동생들이나 조카들이 누님을! 고모님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모습들 보면 나는 다 알 수 있었습니다.

 

 평소 우리 여주 이가 집안의 까다로운 전통적 사고방식들... 특히 열린 사고보다는 너무나 까다로운 사고를 많이 하는 집안임에 틀림없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 틈바구니에 엄격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 휘하에 7남매의 틈바구니에서 가장 고생하신 우리 어머님! 누구나 다 인정하실 겁니다.

 

 어느 날 방아를 찧어야 하는 데 혼자 디딜방아 발판에 온 몸을 얹어 밟아도 방아가 올라오지 않으니 냇가에 넓적한 돌을 하나 주워 머리에 이고는 방아를 찧기 시작했단다.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그 날 40리 밖에 있는 친정(청통 애련)에 사시는 우리의 외할머니께서 직접 걸어 딸네 집으로 들어오게 되었단다. 그래도 법도와 예의가 있는 이씨 집에 시집보낸 딸이란 평소의 생각을 갖고 있는 터인데 머리에 돌을 이고 디딜방아를 찧고 있는 딸의 모습을 보고는 충격을 받으셨다. 이 무슨 꼴인고? 이 서방네 집이 이럴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마당에 바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발길을 돌려 왔던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답니다. 그 사연을 뒤늦게 아신 아버지께서 들에서 오시자마자 2Km를 따라가서 길바닥에 엎드려 절하면서 외할머니께 용서를 빌었는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애련으로 돌아가셨답니다. 그 이후로 외할머님이 우리 집에는 오지 않으셨다는 일화 한 토막도 있습니다.

 

 백부님은 일찌기 공무원으로 일하시고 아버지 밑으로 동생들(셋째 넷째 숙부)은 각자 자기의 업종을 찾아 나가시고 우리 아버지만 할아버지 곁에서 뜻을 따라 농사꾼으로 성장하셨으니 어떤 의미에선 우리 어머님의 시집살이는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을 겁니다.

 

 그 와중에 1944년 6월 어느 날 일본이 일으킨 대동아전쟁이 한창일 즈음에 식민지 쟁탈이 날로 심해지고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무논에 모심기 준비작업으로 써레질을 하시다가 잡혀서 징용가게 되었으니 결혼 7년쯤에 남편을 전쟁터로 강제로 보내지는 모습을 지켜본 아내로서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 때부터 가슴이 미어지는 일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 후 해방되고 3개월이 지나서야 두 친구의 유해를 안고 또 짊어지고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남편의 얼굴을 다시 만날 수 있었음에 남다른 감회는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 후 아버지께서 다시 농사일을 하시며 제2의 결혼생활이었겠지요. 그 후에 누나와 저 동생 둘이 태어났지요.

 

 키우시는 과정에서 또 비운이 다가왔다. 그렇게 존경하고 서로 사랑하며 의지했던 당신의 큰 동서, 저의 백모님께서 6.25동란 중에 병사하시는 충격을 온몸으로 감당하셔야 했었다. 돌아가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동서는 부디 부디 건강하게 내 수명까지 보태어 오래 오래 잘 살고 저 어린 것들 잘 부탁한다.”고 손잡고 당부하셨다니, 그 때 저의 4촌들이 아들만 4명이었다. 특히 막내는 저보다 한살이 더 많았으니 백모님 돌아가실 때 세 살이었을 것이다. 세 살 아들을 두고 먼저 눈을 감아야만 했던 백모님의 가슴 미어지는 한스러움이나 그를 옆에서 지켜봐야만 하는 우리 어머님의 심정 또한 어떻게 헤아려 볼 수 있겠습니까?

 

 동란을 겪고 난 다음, 우리 5남매와 큰집 4남매 그리고 중부께서 4촌 세 명의 자녀를 두고 두 분이 돌아가시게 됨으로써 광농에, 머슴 둘에, 아이들 12종반들까지, 한 지붕 밑에서 돌봐야 했습니다. 때로는 젖도 먹이고, 잔정이 많은 터이라 바른 맘과 자세를 갖고 생활하도록 타이르고 꾸짖으면서 키워냈다. 어느 교육자의 자세가 이토록 올바르고 진지하였었을까? 이렇게 키우고 돌본 자녀 및 조카들이 무럭무럭 자라 오늘날까지 생활을 잘 하고 있음에 어머님 자신은 할 일을 다 하였음에도 늘 안타까운 맘만 가지고 아직까지 걱정을 하신다.

 

 영대병원 응급실에서 16일 저녁에 집중치료실(중환자실 969호)로 옮겨졌고 한숨을 돌리고 나니 형님도 나도 집사람도 서로를 쳐다보면서 안도의 맘을 갖게 되었다. 16일 저녁이 지나고 17일 아침이 되니 조금씩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17일 저녁에는 눈도 자주 뜨시고 의식이 돌아오기 시작했고 거의 마비되었던 오른 팔과 다리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8일 아침이 되자 어머님의 오른 쪽 팔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악수를 할 수 있기까지 되었다. 얼마나 반가운 일인지 어머님 자신도 가끔씩 흐뭇해하시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제 오른 쪽 다리만 의도대로 들 수만 있다면 하는 기대로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형제애가 너무나 두터운 막내이모 내외분께서 오셨다가 면회를 하고 가셨다. 표정과 말끝마다 안타까워하시는 두 분의 기대와 바람에 어머님은 반드시 화답이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모님과 이모부님! 저희들도 어머님 병환 회복되시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약 23년 동안이나 대륜이란 울타리 속에서 맺었던 두터운 옛정과 인간관계로 형님이상으로 보살펴주셨던 김영화교장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싶고, 그 아들 김세원 군! 대륜에서 직접 가르쳤던 사제지간의 관계로 우리 어머님에 대해 배려하는 그 마음과 도움에 대해 감사한 마음 전하고 또 기록해 두고 싶다. 오래 오래 기억하고 작은 갚음이라도 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20일 일요일 이날은 일찌감치 어머님 곁에서 하루를 지낼 작정으로 병원에 도착했다. 형님, 형수, 구원, 구선이 내외, 광훈이 내외, 우리 내외 등, 이렇게 모두 모여 보니 어머님께서는 그렇게 흐뭇하신 모양이었다. 거의 모든 가족들을 기억해낼 수도 있고 얘기도 하셨다. 이렇게 병원에서라도 한 가족이 모일 수 있음에 어머님 자신은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이 기회를 자주 만들지도 못하고 그 외로운 산촌에서... 고향이라는 핑계를 대고 모두들 다 떠나보내고 혼자 계시도록 한 자식들 정말 해결책은 없었을까? 그래도 어머님은 괜찮다고 하시면서 자식들 손자들 걱정하시고 기도하고 마음으로 빌어주신다. 오래간만에 한번 들리고 돌아서는 자식들 손자들! 뒷모습 보고는 늘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안 그런 척 그 모습 안 보이시려고 하셨다. 하늘보고 부끄럽게 생각하고 백배 사죄해도 부족합니다. 이 불효의 죄를 언제 다 갚을 수 있을지? 어머님! 어머님! 우리 어머님! 잘못했습니다. 아무리 뉘우쳐도 용서를 빌어도 부족입니다. 늘 용서해주셨지만 자식인 저희들로서는 용서받지 못할 행동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내 자식들을 키워 시집 장가보내보고 나서야 겨우 그 잘못했음을 조금이라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머님은 그 위치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어머님!

 

 이제 와서라도 다짐하노니! 어머님 가르침 항상 명심하고 그르치지 않음은 물론일 것이고 늘 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겐 정말 훈풍처럼 대하는 그 태도와 가르침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어머님과 같이 낮추겠습니다. 평소 어머님 못 다한 소원 들 중에서 다 알아차리지도 실천하지도 못 한 것들이지만 틈틈이 찾고 되새기고 깨달아 최선을 다해 가르치고 몸소 실천하도록 최선을, 부족하다면 차선이라도 노력하겠다고 어머님께 다짐 드립니다. 

 

 몸이 그렇게 불편하고 아프셔도 겉으로 표현해내지 않고 자식들 손자들이 가까이 오면 환하게 웃으시고 다시 힘내시는 그 모습, 세월을 이기지 못할 것 같지만 이겨 오신 그 모습, 언제나 부처 같으신 그 맘과 자세 깊이 명심하여 어머님의 자식 됨 손자 됨 들에 있어 손색이 없을 것이며 항상 남의 귀감이 될 수 있을 것임을 자부합니다. 

 

 어머님 당신의 육신이 많이 약해진 모습을 지켜보며 울먹이고, 안타까이 여겨도 우리에게는 새로운 용기도 희망도 자신감도 삶의 지혜도 주시지만 자신은 다 줘버리고 약해지시기만 하고 있습니다. 하늘, 바다, 부처 같은 우리 어머님! 감사합니다.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불효 자식은 울 뿐입니다. 어머님 자식으로 부끄럽지 않게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겠습니다. 어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