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택근 아나운서의 오늘
제 나이 쯤 되시는 분께 궁금한 소식을 전합니다 임택근 아나운서 하면 누구나 알고있다 싶이 이름난 분의 기사를 보게 되였습니다. 지금 그가 어떻게 지내는지 아래 기사를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K . Y . J |
제 꿈을 3년 반째 휠체어 신세인 임택근씨가 서울 송파구 장지동 자택에서 굴곡진
곁에 있던 부인이 “연세대 강남 세브란스병원에 자기공명영상(MRI) 찍으러 갈 때는
임씨는 “연세대 총동창회 사무총장을 10년 넘게 지내고, 동창회관도 지은
세계대회를 제주에 유치해 사회를 맡았고, 쓰러지기 1주일 전까지 골프를
“6·25전쟁 때 임시수도 부산에서 피란민수용소와 다름없는 판잣집 임시교사
입학 4∼5개월 뒤인 1951년 여름 서울 중앙방송국에서 아나운서를
모집한다는
광고방송을 들었어요. 4년제 대학 졸업자에게만 응시자격이있다며
원서접수조차 거절당했어요. 고민 끝에 당시 KBS 국장
말아 달라”며 “낭독엔 자신 있으니 한번
제 목소리를 들어봐 달라”고 간청했다.
질린 노 국장이 결국 응시를 허락했다.
미성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인 그는 “아나운서가 될 팔자인지,
시끌벅적하던 교실이 삽시간에 교회 기도 시간처럼 조용해지곤 했지요.
잡고 연설하며 그 행렬을 선도해 나갔습니다.
그가 ‘어쩔 수 없이 마이크를 잡고 방송을 해야 하는 운명’이라 는
생각을 갖게 한 사건이 있었다. 1959년 4월 필리핀에서 열린 아시아여자
한국은행 여자 농구단이 7전 전승 끝에 결승에 오른 날 그는 지독한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는 경기는 극적으로 한 골 앞서 종료됐고 그는
사생결단하고 붙던 시절이었죠. 라디오 중계방송으로 제가 전한 우승소식에
시골 동장 이장집 라디오, 종로통에는 스피커를 통해 길거리에서 수백명이
그런데 정신없이 중계방송을 마치고 나자 비 오듯 흐르던 땀이 자취를 감추고 펄펄 끓던 열도 내렸다.
신기하게도 방송을 하던 중에 감기가 말끔히 나은 것이다.
금의환향 후 선수단과 함께 경무대로 초청된 그는 이승만 대통령을 처음 만난다.
이 대통령은 한쪽 구석에 있던 그를 보자 대뜸 “임 변사 앞으로 나와!
자네 수고가 참 많았네. 어떻게 그렇게 말을 빨리 하고,
“악수를 했더니 대통령의 손은 제 손의 두 배 크기에 팔순이 다 된 나이
에도 장작을 직접 쪼갠다는 소문대로 손가락
마디마디에 못이 박혀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역시 역사의 거인은 거인이더군요. 그때 만나본 첫인상은 그랬어요.”
“제가 오빠부대의 원조 맞습니다. 1954∼1956년 ‘노래자랑’과 ‘스무고개’ 사회를 맡았는데 반응이 엄청났지요.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뮤직홀에서 공개방송을 했는데 그날만 되면
군
팬들이 에워싸고는 악수를 청하고 사인 공세를 펴며 몰려들었지요.
어떤 때는 아줌마들이 혼잡을 틈타 양복이나 와이셔츠 단추를 기념으로 뜯어가는 등
낭패를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꿈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면서 청혼해 오는 여인도 있었지요.
1958년 2월16일 스튜디오에서 뉴스를 보내고 있던 그에게 속보라면서 다급히 쪽지가 전달된다.
승객 명단을 읽어 내려가던 도중 공군대령 김기완이라는 이름을 보자,
'성 김'
임신 중이던 누님 임현자(81)씨는 혼절해 일어날 줄 몰랐다.
연일 시청앞 광장에선
자형은 당시 현역 공군 대령으로 대북 심리전 책임자인 공군 정훈감으로
유봉순 국회의원, 두번째 차에 그의 자형이 타고 있었다.
“며칠간 중계방송으로 연일 긴장하고 추위에 떨었던 터라
서울로 오자 심한 몸살을 앓았지요.
꼬박 1주일 동안 일어 나지 못한 채 평생 처음 앓는 지독한 감기몸살과
싸웠고 식은땀을 내며 헛소리를 했습니다. ”
오는 10일 주한미대사로 부임하는 성 김(김성용)씨가 예편 후
주일공사를 지낸 고 김기완씨의 아들로 그의 조카다.
그는 “조카는 어려서부터 소문난 효자였다”며 “자형이 1993년
폐암 판정을 받고 1994년 사망하기까지 1년간 국무부를
“이민초기 제가 미국 여행 가면 국민학교 때 농구도 같이하곤 했어요.
명문대 로스쿨을 나와 검사시보(사법연수생) 가 됐는데, 스패닉계의 어두운 사건을 다루기 싫다며
외교관 시험에 합격해 외무부로 들어갔지요.
사법고시와 외무고시에 모두 합격한 셈이지요.
주한미대사관에서도 군사정치담당 1등 서기관을 3년 정도 지냈지요.”
그는 “이민 가면 몇년 안 돼 한국말 잊어버리고, 버터 냄새 풍기는이상한 발음하는 게 대부분인데, 누님은 자녀들이 한국말 교육을 계속하도록 해 지금도 5남매가 연하장을 한국말로 제게 써보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조카가 한·미수교 130년 만에 한국계 미국대사라는 영광스러운 첫 기록을 세웠다”며 “자랑스러운 조카”라고 했다. “바라건대 조카가 한국 국민과 미국 국민에게 모두 사랑받는 주한 미대사로서 직분을 성실히 수행하고 좋은 성과를 내게 해주십사고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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