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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여인열wjs(1)~(2)!-재편집 등재합니다. 도움되시길...

마징거제트 2012. 7. 23. 14:50


          다시 읽는 여인열전 1           


  ‘신라시대 벤처인’ 김문희


       ‘왕비 꿈’사서 목숨 걸고 베팅   …자손에 ‘왕위’배당




‘벤처’ 는 모험이며 도전이다.
21세기 시대정신처럼 불리는 벤처는 사실 역사 속 어느 시대에나 꿈과 야심을 가진 인물들에 의해 발휘됐고, 역사를 변화시켰다. 신라 김유신의 동생이자 김춘추의 부인 문희는 자신의 인생 전체를 벤처 캐피탈로 삼아 쉼없이 모험적 투자에 도전, 결국 ‘대박’ 을 터뜨린 여성 벤처인이었다.

문희의 아버지 각간 서현과 만명부인의 결혼을 『삼국사기』는 ‘야합(野合)’ 이라고 표현했다. 허락 받지 못한 사랑이라는 뜻이다.
둘의 결합을 만명부인의 친정에서 반대했다. 만명부인의 아버지는 갈문왕 입종의 아들
숙흘종이었는데 서현이 가야계라는 이유로 반대한 것이다. 서현은 만명부인을 데리고 만노군 (萬弩郡 : 충북 진천)으로
도망갔고 그 곳에서 김유신을 낳았다.

어느 날 보희가 경주 서악에 올라 오줌을 누는데 온 서라벌이 오줌으로 가득
차는 꿈을 꾸었다. 보희는 그 꿈을 망칙하게 생각했으나 동생 문희는 달랐다.
문희는 즉석에서 꿈을 사겠다고 제안했다. 언니가 무엇을 주고 사겠느냐고
묻자 ‘비단치마’ 를 주겠다고 답했다. 거래가 성립되어 문희가 옷깃을 벌리자,
보희는 “어젯밤 꿈을 네게 준다” 고 말했고, 문희는 비단치마로 값을 치렀다.

소녀들의 순진한 장난 같지만 실제 비단치마가 값으로 치러졌다는 점에서
정식 거래였다. 당시 비단치마는 국제무역을 통해 수입되는 고가품이었다.
『삼국유사』는 비슷한 시기인 태종 무열왕 때의 포목(布木) 한 필 값이 벼로
서른 섬 혹은 쉰 섬이라고 적고 있으니 지금 시가로 따져서 수백 만원쯤 된다.
문희는 포목보다 훨씬 비싼 비단치마를 주고 꿈을 매수한 것이다.
문희는 그 꿈에 내재한 가능성에 주목했다.

보희라고 자신이 꾼 꿈이 왕비의 꿈이라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현실상 불가능한 개꿈이라고 판단했다. 보희는 성골도 아니고, 서라벌
출신의 진골 정통도 아닌 가야계 출신이 왕비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신당서』 신라전은 “왕족은 제1골이며, 아내도 역시 그 족(族)으로, 아들을
낳으면 모두 제1골이 된다. 제1골은 제2골의 여자에게 장가를 가지 않으며, 간다 하더라도 언제나 잉첩으로 삼는다”고 골품과 혼인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전하고 있다. 보희는 매수자가 있을 때 헛된 꿈을 빨리 매도하는 것이 이익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문희는 과감하게 그 꿈을 매수했다.

델 컴퓨터 사의 마이클 델(Michael S. Dell)이 1984년 단돈 1천 달러의 자본으로 중간판매상을 배제한 직접 판매방식의 PC판매 벤처회사를 창립했을 때 성공할 것으로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 작은 가능성에 투자한 사람들은 몇 년 못 가 수백 배 이상의 수익을 올렸고, 델 컴퓨터사는 오늘날 IBM같은 거대 PC회사와 맞서 세계 1위의 PC판매 기업이 되었다.

▲ 경주에 있는 김유신 장군의 묘.
그는 문희의 오빠이자, 문희의 꿈을
이루게 한 매개자이기도 했다.

문희는 15세에 풍월주(대표화랑)를 역임한 오빠가 가야계란 제약에 갇혀 썩고 있을 인물이 아니라고 믿었다. 아끼던 명마의 목을 단칼에 자를 정도의 결단력까지 있는 김유신이라면 자신이 돕기만 하면 꿈을 현실로 만들 것이라고 믿었다.

문희의 예상대로 김유신은 김춘추와 축구를 하다가 일부러 옷끈이 떨어지게 한 후 집안으로 끌어들였다. 『화랑세기』는 문희가
바느질을 할 때 ‘유신은 피하고 보지 않았다’ 고 적고 있다. 아무도 없는 자리에서 둘의 사랑은 불붙었고 1년쯤 지나자 임신을 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춘추가 문희를 외면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화랑세기』는 그 이유를
김춘추의 정궁부인 보량궁주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보량궁주는 “아름다웠으며 (춘추)공과 몹시 잘 어울렸는데, 딸 고타소를 낳아 공이 몹시 사랑하였다. 감히 문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밀로 하였다.” 는 것이다.

문희는 김춘추와 서라벌 진골 정통들에게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일대 시위를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사전 계획에 따라 유신은 장작 위에 문희를 올려놓고 불을 질렀다. 이때 유신은 “너는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고 아이를 배었으니 무슨 일이냐” 며 꾸짖었는데 문희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문희는 김춘추의 부인이 되었으나 그의 배신행위에 대한 앙금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다. 김유신과 김춘추가 진정으로 화해한 때는 선덕여왕 11년(642) 김춘추의 딸 고타소와 사위 김품석이 백제군에게 전사했을 때였다. 고구려 사신길을 자청한 춘추가 “이번에 내가 고구려에 가서 저들에게 해를 당한다면 공은 무심할 것인가?” 라고 묻는데 매부가 죽어도 가만히 있겠느냐는 말은 둘의 관계가 정상이 아님을 뜻한다. 이에 유신이 “공이 만일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의 말발굽이 고구려 · 백제 두 임금의 대궐 마당을 짓밟아버릴 것” 이라고 답하면서 둘은 화해하는 것이다. 이는 곧 신라 왕실의 핏줄과 가야계 군사력의 결합이기도 했다. 그 결과 김춘추는 성골 출신 마지막 왕인 진덕여왕 뒤를 이어 신라 29대 왕에 등극, 삼국 통일의 기초를 닦는다.

역사는 남성들의 사적만을 기록했지만 그 배경에는 문희의 활약이 있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과감한 투자와 오빠를 움직인 정치력이,
왕비라는 큰 배당을 낳은 것이다. 그녀의 이 투자는 훗날 거대한 유산을 낳았다.
김춘추와 그녀의 자손들은 대대로 신라 왕실을 장악했다.

『삼국사기』 경순왕조는 그녀의 남편 태종무열왕부터 혜공왕까지 8왕을 중대
(中代)라 한다며 혈통을 달리 기술하고 있는데 중대는 문희의 직계 자손들이었다. 태종무열왕계라는 말은 신라사회의 최고 신분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그럼
꿈을 판 보희는 어떻게 되었을까? 『화랑세기』는 “보희는 꿈을 바꾼 것을 후회
하여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지 않았다. (춘추)공은 이에 첩으로 삼았다” 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인과 골품제 / 출세 제한 엄격한 신분제

신라인 설계두는 “신라는 사람을 쓰는 데 골품을 따지기 때문에 그 족속이 아니면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높이 승진할 수 없다”고 한탄하면서 당나라로 이민 간다. 신라인에게 골품은 이민을 결심하게 할 정도의 제약이었다.

골품(骨品)은 왕족을 대상으로 한 골제(骨制)와 일반 귀족과 백성들을 대상으로 한 두품제(頭品制)의 합친 말이다. 왕이 될 수 있는 성골과 그 아래 진골의 골제 아래 6두품을 필두로 1두품까지 자리하고 있었다. 6두품을 득난(得難)이라고 부를 정도였으니 진골이 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김유신은 가락국의 마지막 왕 김구해의 직계 자손이므로 진골이 될 수 있었으나
8세 풍월주(대표화랑) 문노는 어머니가 가야국 문화공주였음에도 진골이 되지 못했다. 문노는 진지왕의 폐립에 참여한 공으로 비로소 진골이 된다. 이렇게 진골에 편입됐어도 가야계는 서라벌 출신 진골들에게 차별 받았다.

김유신의 아버지가 만명부인과 결혼을 허락 받지 못해 야합한 것은 차별의 한 예
이다. 진덕여왕 사후 김춘추가 임금으로 추대 받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는 부인이 가야계 문희라는 것이었으나 군사권을 쥔 김유신의 무력 개입으로 김춘추는 진골 출신 임금이 되는 역전극을 펼친다. 언니의 꿈을 사들인 문희의 당돌한 벤처정신이 골품제의 근간을 뒤흔드는 기폭제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 이덕일/ 역사평론가 2002.03.12 )





문명왕후 김문희 - 삼국통일 낳은 '신라판 여인천하'

서기 572년, 진흥왕 33년 3월의 어느 날 밤.
진흥왕과 정비(正妃) 사도왕후(思道王后)와의 유일한 적자(嫡子)인 동륜태자(銅輪太子)가 개에 물려 죽는 끔찍한 사건이..

“서형산 마루에 앉아 오줌을 누었는데,
 오줌이 흘러 나라 안에 가득찼다.”


비단 치마를 주고 언니 보희의 꿈을 산 것이 그녀의 운명을 달리 만들었을까. 아니면 오빠 김유신과 절친했던 김춘추의 옷고름을 수선해준 것이 인생을 바꾸었을까. 김춘추와의 혼전 임신으로 오빠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 사건이 그러했을까.
파란만장한 삶의 주인공은 바로 신라 문명왕후(文明王后) 김문희다.

훗날 태종무열왕에 오른 김춘추의 아내이자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의 어머니.
그리고 신라를 태평성대로 이룬 신문왕의 어머니이자, 원효대사의 아들인 설총
(薛聰)의 외할머니였다. 중견 여류작가는 “언니의 꿈을 빼앗고 오빠 김유신의
책략으로 횡재해 왕후가 된 것” 쯤으로 오도되어진 문명왕후를 새롭게 평가한다.
최고 권력자였던 오빠 덕에 남자를 잘만난 ‘동양의 신데렐라’ 가 아니라
‘화려하면서 고통스럽고, 잔잔하면서도 열정적인 생애’ 를 살았던 인물로.

이 소설에서 문명왕후는 ‘로미오와 줄리엣’ 못지 않은 뜨거운 정열의 소유자
였으며,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루고 통일신라의 평안을 이루게 만든 숨은 주역으로 그려진다. 이것이 그녀의 “운명이 아니라 의지였고, 얼굴이 아니라 머리에서 비롯된 것” 이란 관점이 문명왕후를 “주체적 여성” 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한다.

단편적인 사료와 아득한 설화의 빈곳을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채운 것은
“풍요로운 여성성의 개화” (문학평론가 김미현)를 위함이다. 이같은 작의(作意)는 비단 문명왕후 개인에 그치지 않고 다른 여러 여성 등장인물에서도 드러난다.
수 많은 영웅과 호걸의 배후에는 이들을 강한 자식들로 키워낸 어머니만이 아니라 남성 권력자의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여러 여성들이 새롭게 부각된다.
신라 문명왕후가 조선 문정왕후에 겹쳐보이는 것 뿐만 아니라 이같은 여성 중심의 역사 서술이 이 소설을 신라판 ‘여인천하’ 마냥 흥미롭게 만든다. (2001-11-24)

이름 : 최규성 아이디 : baronaya 등록일 : 03/13/2002 11:33:59
김춘추 부인이 보량궁주 ? 진위논란의 대상이기도 한 <화랑세기>.
암튼 그 책 다시 보시길... 보량이 아닌 보라궁주로 되어있다.
보량은 김양도 부인으로 나옴

화랑세기 자체를 신뢰하기 뭣하지만 그에 따르면 이렇다.
보종과 양명이 결혼 보량, 보라를 낳음.
보라는 춘추, 보량은 양도와 결혼한다. 이름이 비슷해 착각했을까? 글쎄 단순히 그럴까?

         다시 읽는 여인열전 2          


  ‘세계무역 개척자’ 소현세자빈

        인질로 잡혀간 청나라서 무역…‘조선상사 CEO’
        곡식 4700석 남기고 볼모 생활 9년만에 귀국



소현세자빈 강씨는 조선의 왕실 여인 中
조선 땅을 벗어났던 유일한 인물이다. 병자호란 패전에 따른 인질로서였다. 세자빈으로 간택되면 평생 궐 밖 구경을 못하는 법이었다. 그런 대궐을 떠나 수천리 나라 밖 심양까지 갔다.

인조 15년 2월 서울을 떠난 강씨 일행이
압록강과 만주 벌판을 지나 심양에 도착한 때는 4월이었다. 강씨가 도착한 곳은 심양 궁궐 근처의 심양관(瀋陽館·현재 심양시 아동도서관 자리)이었는데, 이곳은 사실상 주청 조선대사관이었다. 이곳에서
소현세자는 청나라와 직접 상대하기를 꺼리는 인조를 대신해 많은 일을 수행했다. 청나라의 파병 요구에 응하고 반청활동을 하다 끌려와 재판 받는 김상헌 같은
대신들을 보호하는 것도 큰일이었다.

▲ 소현세자 일행이 끌려갔던 중국 심양관 자리. 현재는 시립아동도서관이 들어서있다. (뒤쪽 붉은 지붕 건물)
소현세자가 이런 정치적 일에 몰두하는 동안 강씨는 심양관의 경제문제 해결이 자신의 몫이라고 판단했다. 심양관에 정착한 조선인
일행은 192명이었는데 이 대식구의 식생활
을 해결하는 것 자체가 큰 문제였다.

당시 심양의 남탑거리에는 조선인 포로를
매매하는 노예시장이 있었는데 돈이 있으면 이들을 속환(贖還)할 수 있었다. 이 무렵의
사정을 적은 ‘심양장계’ 인조 15년 5월조는
속환가(贖還價)가 수백 또는 수천 냥이나 되어 희망을 잃고 울부짖는 백성들이 도로에 가득 찼다고 기록하고 있다. 강빈은 이들을 구할 수 있는 현실적 수단이 돈이라는 사실에 주목한 것이다.

그녀는 돈을 벌기로 결심했다. 인조 17년에 심양의 팔왕(八王)이 은밀히 은자(銀子) 500 냥을 보내 면포(綿布)·표범가죽(豹皮)·수달피(水獺皮)·꿀 등을 무역할 것을 요구할 정도로 청나라는 물품 부족에 시달렸다. 강씨는 청나라 지배층의 두둑한 지갑을 조선의 질 좋은 물품과 연결시키면 큰돈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면포 ·
표범가죽뿐만 아니라 종이와 괴화(槐花) 등 약재와 생강도 좋은 무역품이었다.
담배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무역을 통해 경제에 눈을 뜨던 인조 19년(1641), 기회가 찾아왔다.
청나라에서 농사 짓기를 권유해온 것이다. 심양관의 신하들은 농사를 짓게 되면
영원히 조선에 돌아가지 못할 것을 우려해 처음에는 거절했다. 그러나 강빈의
생각은 달랐다.

청나라는 야리강(野里江) 동남 왕부촌(王富村)과 노가촌(魯哥村) 두 곳에
각각 150일 갈이와 사하보(沙河堡) 근처의 150일 갈이와 사을고(士乙古) 근처 중 150일 갈이를 농토로 제공했는데 하루갈이는 장정 한 명이 하루에 경작할 수 있는 면적의 농토였다.

강빈은 처음에는 한인(漢人) 노예들과 소를 사서 농사를 지었다.
한인들의 값은 은 25냥∼30냥이었고 소 값은 한마리에 15냥∼18냥이었다.
‘심양장계’ 에 따르면 인조 20년에 농사로 거둔 곡식은 3319석이나 됐다.
강빈은 점차 한인 농군을 노예 시장에서 속환한 조선인으로 바꾸었다. 죽음의
고비에서 살아난 조선인 농군들이 더욱 열심히 일했을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덕에 수확물은 더욱 많아졌다. 강씨는 조선의 농법이 가미된 이 농산물을 만주 귀족들에게 팔았는데, 큰 인기를 끌면서 비싼 값으로 매매되었다. 무역만 하던
단일체제에서 생산과 무역을 겸하는 복합체제로 발전한 것이다.

강빈의 경영수완 덕에 인질 생활 초기 울며 호소하는 조선인들로 가득 찼던
심양관 앞 거리는 무역하는 인파로 북적거렸다. ‘인조실록’ 23년 6월조는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모집하여 둔전(屯田)을 경작해서 곡식을 쌓아 두고는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하느라 관소(館所)의 문이 마치 시장 같았다”
고 기록하고 있다.

강빈은 인질 생활에 좌절하는 대신, 대규모 영농과 국제 무역을 주도하는 경영가로 변신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선택이었다. 소현세자가 천주교와 서양 과학 기술을 받아들이는 개방주의자로 변화한 것과 같은 맥락의 변화였다. 이제 이들 부부가
귀국해서 조선의 임금과 왕비가 되면 조선은 변화할 것이었다. 그러나 인조는 이런 강빈과 소현세자를 의심했다. 그는 강씨가 청나라와 짜고 자신을 폐한 후 소현세자를 세우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이런 의심이 인조 21년(1643) 6월 사망한 강빈의 아버지 강석기의 빈소에 왕곡(往哭)까지 막게 했다. 멀리 심양에서 잠시 귀국한 며느리의 왕곡을 못하게 한 인조의 가혹한 조치는 내외의 많은 비난을 받았다.

소현세자 부부는 인조 23년(1645) 2월 9년 간의 인질 생활을 끝내고 부푼 가슴
으로 귀국했다. 이때 심양관에는 4700석의 곡식이 남아 있었다 하니 그녀의 경영수완을 잘 알 수 있다. 그녀는 이런 경영수완으로 조선을 부강하게 만들려고 결심했다. 그러나 세자는 귀국 두달 만에 부왕 인조에 의해 독살되었다. 그녀 또한 비참한 운명에 처해졌다. 인조는 재위 24년 3월 강빈을 폐출해 친정으로 쫓아냈다.

‘인조실록’ 은 “강빈이 덮개가 있는 검은 가마에 실려 선인문을 나갔는데, 길 곁에서 바라보는 이들이 담장처럼 둘러섰고 남녀 노소가 분주히 오가며 한탄하였다” 고 적고 있다. 인조는 이에 그치지 않고 당일로 사약을 내려 강빈을 죽였다.
당시 사관이 “단지 추측만을 가지고서 법을 집행했기 때문에 안팎의 민심이 수긍하지 않았다” 고 비난할 정도로 무고한 죽음이었다. 그녀의 죽음은 시대를 앞서
나갔던 실용주의적 여성 경영자의 죽음이자 그녀가 만들려던 개방의 나라, 실용의 나라 조선의 죽음이기도 했다.

 소현세자는 … 병자호란뒤 淸에 끌려가
      조선의 개방 결심했지만 의문의 죽음으로 좌절


소현세자(1612~1645)는 인조와 인열왕후 한씨 사이에서 난 맏아들이다.
병자호란에서 승리한 청나라는 세자를 인질로 요구했다. 그로 인해 강화가 결렬
되자, 세자는 “내가 비록 잘못되어도 아들이 있으니 괜찮다” 며 인질을 자처했다. 이에 따라 세자는 동생 봉림대군을 비롯한 186명의 조선인들과 함께 1637년
당시 청의 수도였던 심양으로 끌려갔다.

세자는 1644년 남진하는 청군을 따라 북경에 가서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
(Schall, J.A)을 만나 천주교와 서양의 과학을 접한 후 조선을 개방하기로 결심한다. 9년 간의 인질 생활 끝에 귀국한 소현세자가 이방송(李邦訟) 등 천주교 신자인 중국인 환관 · 궁녀를 대동하는 한편 서양의 각종 과학기구 · 서적들을 가져온 것은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현세자의 뜻은 이뤄지지 못했다. ‘인조 실록’ 에 “일곱 구멍에서 피가 나와 독약에 중독된 사람 같았다” 고 기록된대로, 그는 귀국 두달만에 독살 당한다. 조선의 종법(宗法)은 장자가 죽으면, 동생이 아니라 장손이 뒤를 잇는 것인데
인조는 세자의 장남 석철이 아니라 동생 봉림대군(효종)에게 뒤를 잇게 했다.
뿐만 아니라 석철을 제주도로 귀양보내 죽였고 강빈의 친정 어머니와 두 친정
오빠까지 죽였다. 자신이 소현세자 독살을 주도했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2002.03.19 )

● 다음편은 ‘남성 지배사회에 맞선 성해방론자―어우동’입니다.

         다시 읽는 여인열전 3          


  남성지배 사회에 맞선 어우동

        성적매력으로 남성들 지배한 ‘500년전 마돈나’
        윤리보다 자유 택해 … 종친-공신 20여명과 관계




조선시대는 남성들의 축첩을 허용하면서 여성이 이를 질투하면 쫓아내도 좋다는 안전판을 만들었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삼종지도(三從之道)라는 성적 억압에
순종하며 박제화된 삶을 강요당했다. 그러나 어우동은 달랐다.

조선초 성종시대(15세기), 승문원 지사(정3품) 박윤창과 정씨 사이에서 태어난
어우동은 집안이 부유했고 자색도 뛰어났다. 종친 태강수(泰江守:정4품) 이동(李仝)과 혼인할 때까지만 해도 그녀 앞길은 순탄했다. 그러나 그녀는 강요된 행복을 거부하고 여자로서의 해방된 삶을 꿈꾸면서 전혀 다른 인생길로 접어들었다.
훗날의 사서(史書)들은 그를 구제불능의 음부(淫婦), 인륜을 저버린 반사회적
일탈자로 규정하고 있지만, 어우동에게 중요한 것은 윤리보다는 인간으로서의
자유였다. 20세기의 마돈나가 그런 것처럼, 그는 자신에게 부여된 미모와 매력을 남성 중심사회가 갈망하는 성적 환상으로 가공해 뭇 남성들을 한껏 조롱하는 무기로 삼음으로써,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고 차별과 억압의 사회를 거부했다.
그는 남성에게 예속되지 않았다. 그는 남성의 주인이었다.

결혼 후 그녀의 첫 상대가 천한 신분의 은장이(銀匠)였던 점부터가 어우동의 삶이 지닌 혁명성을 예고한다. 『용재총화』는 “남편이 나가고 나면 계집종의 옷을 입고 은장이 옆에 앉아서 그릇 만드는 정묘한 솜씨를 칭찬하다가 내실로 끌어들여 마음껏 음탕한 짓을 했다” 라고 적고 있다. 친정으로 쫓겨난 어우동은 곧 여종과 길가의 집을 구해 독립했다. 조선시대판 커밍 아웃(coming out)이었다.

어우동의 애욕 대상에는 전 남편의 친척이기도 한 종친 방산수(方山守) 이난(李▩)도 들어 있었다. 이난은 어우동의 자색도 자색이지만 한시를 종횡으로 짓기까지
하는 재능에 반해 어느날 자신의 팔뚝에 이름을 새겨달라고 그녀에게 요청했다.
이는 스스로 어우동의 소유가 되겠다는 뜻이었다. 이난 뿐 아니었다. 종을 매매하는 일로 만난 전의감(典醫監)의 박강창과 길에서 만난 서리 감의향(甘義享)도 팔뚝과 등에다 이름을 새겨 그녀의 소유가 되었다.

어우동과 여종은 길가의 집에서 오가는 남자를 점찍었는데, 여종이 “아무개는 나이가 젊고, 또 아무개는 코가 커서 주인께서 가지실만 합니다” 라고 말하면 어우동은 “아무개는 내가 맡고, 아무개는 네게 주겠다” 며 남성들을 분배했다.

생원 한 명이 집 앞에서 어우동이 걸어가는 것을 보고 여종에게 “지방에서 뽑아
올린 새 기생이 아니냐?” 고 묻자 여종은 서슴없이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어우동을 노류장화라고 생각한 생원은 어우동을 희롱하며 뒤를 따랐다. 집에 도착한 어우동이 침방에서 비파를 타면서 성명을 묻자 그는 “이생원” 이라고 대답했다. 어우동은 “장안에 이 생원이 얼마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성명을 알겠는가?” 라며 화를 벌컥 냈다. 그는 “춘양군(春陽君)의 사위 이생원을 누가 모르는가?” 라며
이승언이란 이름을 댈 수밖에 없었다.

여성에게 큰 감옥일 뿐이었던 나라 조선에서 어우동은 아버지와 남편, 아들에게
속하지 않은 유일한 독립여성이자 남성들에 대한 선택권을 쥔 유일한 자유여성이었다.

사실 어우동의 이런 자유분방한 성생활은 불법이었다. 그러나 그 불법의 공간에
뛰어든 것은 그런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한 남성 사대부들이었다. 그것도 종친에서 공신 출신 벼슬아치까지 조선을 지배하는 사대부들이었다. 종친 수산수(守山守) 이기(李驥)는 단옷날 그네 뛰는 어우동의 모습에 반해 남양군(南陽郡)의 서울사무실인 경저(京邸)에서 정을 통한 후 어우동의 길가 집에 드나들었다. 적개·좌리공신 출신으로 이조판서를 지낸 어유소(魚有沼)는 조상을 모시는 사당(祠堂)에서
어우동과 정을 통했다.

이런 사실들이 어떻게 드러나게 되었는지는 분명한 기록이 없지만 사건이 한번 드러나자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종친과 공신, 그리고 벼슬아치들을 중심으로 관련된 사내만 20 여명에 가까웠던 것이다. 특히 근엄한 종친 · 사대부들의 위선적인 애정행각이 드러나면서 조정은 섹스스캔들의 충격에 휩싸였다.

어우동이 이난, 이기와 함께 의금부에 구속된 가운데 수사가 확대되자 대부분의 남성들은 관계를 부인했다. 성종은 그 자신이 호색이기도 한 때문인지 어우동과 상대 남자 모두를 관대하게 처리하려 했으나 위기감을 느낀 일부 사대부들이 강경처벌을 주장했다. 성종은 결국 어우동만을 음부(淫婦)로 몰아 ‘삼종지도’의 이데올로기를 수호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승정원은 어우동의 죄를 『대명률(大明律)』의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하여 바로 개가(改嫁)한 것’에 비정해 교부대시(絞不待時:늦가을까지 기다리지 않고 즉시 형을 집행하는 것)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종 11년(1480) 10월 18일 그녀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남성지배이념에 맞선 독립생활의 대가는 이처럼 가혹한 것이었다. 『성종실록』의 사신(史臣)이 그녀의 사형을 주장한 김계창에 대해 ‘이때의 의논이 그르게 여기었다’고 비난한 것이 역사가 전하는 유일한 위로였다. 그녀와 통정했던 남성들은 성종 13년 8월 이난과 이기가 유배형에서 풀려난 것을 마지막으로 모두 석방되고 조선의 남성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삼종지도를 가르쳤다.


 [조선조의 섹스스캔들]
      초기엔 왕실 성추문도


▲ 1985년 이장호 감독에 의해 영화화됐던 ‘어우동 ’포스터./태흥영화사 제공
조선의 양대 성추문은 어우동과 감동의 섹스스캔들이었다. 세종 때의 감동도 사녀(士女)로서 수많은 벼슬아치들과 얽히고 설킨 통정으로 충격을 주었다. 그녀는 김여달에게 강간당한 후 남성편력에 나선 점이 어우동과 다르다. 감동도 사형 여론에 시달렸으나 세종이 유배형으로 마무리지었다. 조선초에는 왕가의 섹스스캔들도 빈발했다. 태조의 세자 방석의 빈이었던 유씨는 내시와 통정하다가 친정으로 쫓겨났으며, 문종의 빈이었던 봉씨도 여종과 동성애를 나누다가 폐출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표면적인 섹스스캔들이 감소했다. 주자학 유일체제가 수립되면서 남성·장남 위주의 종법이 강화되고 열녀가 숭상된 반면 불륜은 엄하게 처벌된 탓이다. 숙종 7년 유학(幼學) 유진무의 딸 순(順)이 자신의 종과 정을 통했다는 이유만으로 사형 당한 것이 이런 분위기를 말해준다. 조선 후기 여성 억압은 신분제 강화와 맥을 같이 했다. 그러나 영조 때 영의정 김재로가 ‘근래 여염에서 여종의 남편이 처의 상전을 능욕하는 자가 흔히 있다’고 말한 것처럼 현실은 사대부들의 의지와는 달랐다. 그러자 남성들은 간통 현장에서 여성을 때려죽이는 것으로 국가를 대신해 직접형벌권을 사용했다. 이와 동시에 각지에 경쟁적으로 열녀문이 세워지자 많은 여성들은 열녀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는 길을 택했고 표면적인 섹스스캔들은 잦아들었다. 여성은 모든 점에서 남성의 부속물이 되어갔다.
(이덕일/역사평론가 2002.03.26)


         다시 읽는 여인열전 4          


  대제국을 지배한 여자 기황후


        공녀에서 元황후로 … 현지화 전략으로 ‘운명 개척’





훗날 세계 제국의 지배자로 군림한 기황후(奇皇后)의 출발은 절망뿐이었다.
고려인 기자오(奇子敖)의 막내딸이 원나라에 바쳐지는 공녀(貢女)로 결정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녀의 비참한 인생길을 동정했다. 목은 이색이 “공녀로 선발
되면 우물에 빠져 죽는 사람도 있고, 목을 매어 죽는 사람도 있다” 고 말할 정도로 비참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기(奇)씨 소녀는 달랐다. 비록 자원한 공녀길은 아니지만 이왕 뽑힌 이상,
이를 새로운 인생의 계기로 삼겠다고 결심했다. 세계를 지배하는 원나라이니 만큼 더 많은 기회가 있으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원 황실에 포진한 고려 출신 환관들의 대표였던 고용보는 기씨 소녀같은 인물이 꼭 필요했다. 기씨 소녀라면 황제 순제 (1320~1370)를 주무를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고 그녀를 순제의 다과를 시봉하는 궁녀로 만들었다.

▲ 원제국에 끌려간 기황후가 거주했던 흥성궁터. 현재 베이징 중난하이(中南海)로 중국 공산당 최고 인사들이 살고 있다./조선일보 DB사진
‘원사(元史) 후비열전’ 이 “순제를 모시면서 비(妃:기씨)의 천성이 총명해 갈수록 총애를 받았다” 고 기록한 것처럼 그녀는 곧
순제를 사로잡았다. 여기에는 고려에 대한 순제의 남다른 추억도 작용했다.

명종의 장자로서 황태자였던 토곤 테무르(순제)는 1330년 7월 원 황실 내부의 싸움에 패배해 인천 서쪽 대청도에 유배된 적이 있었다. 1년 5개월을 대청도에서 보낸 그는 원나라로 돌아가 2년 후에 황제에 즉위한다. 동아시아에서 동유럽에 이르는 세계제국의 후계자에서 고려의 작은 섬에
유배되었던 기억은 어려운 시절에 대한 향수와 어우러져 기씨에 대한 호감으로
작용했다.

기씨는 순제를 통해 자기 뜻을 펼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기씨는 곧 큰 시련에 부딪쳤다. 다름 아닌 황후 타나시리의 질투 때문이었다. 타나시리는 채찍으로
기씨를 매질할 정도로 질투가 심했으나, 기씨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순제를 내세워 타나시리와 싸웠다. 타나시리의 친정에 불만을 갖고 있던 순제는 기씨의
의도대로 1335년 승상 빠앤과 손잡고 타나시리의 친정을 황제 역모사건에 연루
시켜 제거했다. 그리고 타나시리에게 사약을 내렸다.

타나시리를 제거하는데 성공한 기씨는 순제를 대주주로 한 원제국의 CEO 자리를 차지하려 했다. 순제도 그녀가 황후가 되는 것을 지지했으나 원 제국의 또 다른
대주주였던 빠앤이 적극 반대했다. 관직 이름만 246자에 달했던 빠앤은 사실상
순제를 능가하는 실력자였다. 고려의 공녀 출신이 황후가 되겠다는 구상은 원나라의 지배구조상 무리였다. 몽골족은 태조 징기스칸 이래 옹기라트 가문에서 황후를 맞이하는 전통이 있었다. 이에 따라 순제 5년(1337) 황실 전통에 따라 옹기라트 가문의 빠앤후두가 황후가 되었으나 기씨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빠앤까지 축출하기로 결심했다. 기씨는 1339년 순제의 아들 아유시리다라를 낳아 입지가 더욱 확고해졌다. 기씨의 조종을 받은 순제는 스승 샤라빤과 손잡고 빠앤을 축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녀는 드디어 세계를 지배하는 원제국의 제2황후가 되었다. 기씨의 성공에는 고려 출신들을 주축으로 철저하게 현지화 전략을 펼친 것이 주효했다. ‘원사(元史)’ 는 그녀가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먼저 징기스칸을 모신 태묘(太廟)에 바친 후에야 자신이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현지화 전략으로 명분을 축적하면서 원의 황실을 장악했던 것이다.

제1황후가 있었지만 자기 능력으로 황후가 된 기씨의 위세는 제1황후를 능가했다. 그녀는 흥성궁(興聖宮:현 베이징 중남해 자리)에 거주하면서 황후부속기관인 휘정원을 자정원(資政院)으로 개편해 심복인 고용보를 초대 자정원사(資政院使)로 삼았다. 자정원은 기황후를 추종하는 고려 출신 환관들은 물론 몽골 출신 고위관리들도 가담해 ‘자정원당’이라는 강력한 정치세력을 형성했다. 기황후는 1353년 14세의 아들 아유시리다라를 황태자로 책봉하는데 성공, 안정적인 경영기반을 구축했다. 또한 그녀는 고려 출신 환관 박불화를 군사 통솔의 최고책임자인 추밀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만들어 군사권까지 장악했다.

기씨는 이렇게 장악한 권력을 누구를 위해 사용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공녀였던 그녀는 힘없는 백성들의 고초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원사 후비열전’ 은 1358년 북경에 큰 기근이 들자 기황후가 관청에 명해 죽을 쑤어주고, 자정원에서는 금은 포백·곡식 등을 내어 십여 만 명에 달하는 아사자의 장례를 치러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규모 아사자가 발생하는 것은 원제국의 위기였다.

기씨는 이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원 황실의 근본적인 체질개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원사’ 는 순제가 “정사에 태만했다” 고 기록한다. 기황후는 이런 무능한 대주주를 젊고 유능한 인물로 교체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기황후는 순제를 양위시키고 황태자를 즉위시켜 위기를 돌파하려 했다.

칼리 피오리나 HP회장이 “디지털 경제시대에 경쟁력을 갖추려면 기업의 과감한
체질개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며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 적극적 경영마인드를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 논리였다. 피오리나의 남편 프랭크는 회사를 그만두고
피오리나가 CEO가 될 수 있게 도왔지만 순제는 달랐다.


기황후의 지시를 받은 자정원사 박불화(朴不花)가 양위를 추진하자 순제는 거칠게 반발했다. 순제는 무능 · 태만해도 최고경영자 자리를 내놓을 생각은 없었다. 그는 대신 황태자에게 중서령추밀사(中書令樞密使)의 직책과 함께 군사권을 주는 것으로 타협했다.

이것이 기황후의 실수였다. 당시 과감한 구조조정은 원나라의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이런 위기의 시기에 순제라는 무능한 최고경영자를 둔 원나라는 급속히 약화됐다. 1366년 원제국은 주원장에게 대도 연경을 빼앗기고 북쪽 몽고초원으로 쫓겨가야 했다. 공녀 출신으로 황후까지 된 기씨 소녀의 ‘몽골리안 드림(Mongolian dream)’ 도 몽골 초원에 묻혀져 잊혀졌다.

  [기황후의 친인척]
    오빠-조카 기고만장하다 역모혐의 처형당해


기황후가 우리 민족의 뇌리에 부정적으로 각인된 이유는 오빠 기철(奇轍) 등
친인척 관리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기철은 「고려사」반역조에 올라있을 정도로 평판이 나빴다.

기철은 동생 덕에 원나라로부터 정동행성 참지정사에 임명되고 고려로부터도
덕성부원군에 임명되면서 고려 임금을 우습게 알았다. 공민왕 2년(1353) 기황후의 모친 이씨를 위한 연회에서 공민왕이 조카인 태자에게 무릎꿇고 잔을 올리고 태자가 왕에 앞서 이씨에게 잔을 권하는 것을 본 기철은 기고만장했다. 그는 공민왕과 말을 나란히 하며 걸어가려다가 호위군사들에게 제지당하기도 하고, 공민왕에게 시를 보내면서 신하라는 말을 쓰지 않기도 했다. 여기에 조카 기삼만 등 친족들이 백성들의 전토를 함부로 빼앗는 전횡을 저지르면서 원성의 대상이 되었다.

그 결과 기철은 1356년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로 공민왕에게 주살 당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기황후는 태자에게 “이만큼 장성했는데 어찌 어미의 원수를 갚아주지 않느냐” 고 원망했다. 1364년 기황후는 공민왕을 폐한 후 충선왕의 3자 덕흥군 (德興君)을 왕에 책봉하고 최유에게 1만 여 군사를 주어 압록강을 건너게 했다.
하지만 최영과 이성계의 군사에게 전멸 당하면서 친정 복권계획은 무위로 끝났다. (이덕일·역사평론가 2002.4.02)


         다시 읽는 여인열전 5          


  개혁적 문필가 허난설헌

        여성-貧者의 아픔 노래한 16세기 ‘저항시인’
        죽은 뒤 나온 시집으로 중국-일본까지 명성





허난설헌(1563∼1589)에게는 세 가지 한이 있었다.
첫째, 이 넓은 세상에서 왜 하필이면 조선에 태어났을까?
둘째, 왜 하필 여자로 태어나서 아이를 갖지 못하는 서러움을 지니게 되었을까?
셋째, 수많은 남자 중에서 왜 김성립(金誠立)의 아내가 되었을까?

이 세 가지 한은 “왜 조선에서 여자로 태어났을까”란 말로 압축할 수 있다.
동인(東人) 영수 허엽(許曄:1517∼1580)의 셋째 딸로 태어난 그녀는 8세에
‘백옥루상량문’ (白玉樓上樑文)을 지어 신동으로 불릴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다.
하지만 ‘삼종지도의 나라’ 조선에서 여성의 재능은 불필요한 혹일 따름이었다.
그녀는 오빠 허봉(許封)의 주선으로 삼당시인(三唐詩人) 이달(李達)에게 글을
배웠다. 여성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던 당시에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행복한 유년시절은 결혼과 동시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조혼 풍습에 따른 14세의 결혼은 불행한 미래에의 초대장이었다. 남편 김성립(金誠立)은 집을 떠나 과거공부에 전념했는데, 그런 시절의 일화가 전한다. 함께 과거공부를 하던 친구가 “성립이 기생집에서 놀고 있다” 는 말을 지어내자, 여종이 이를 난설헌에게 말했다. 그녀는 도리어 술과 안주를 마련해 “낭군께선 이렇게 다른 마음 없으신데 /
같이 공부하는 이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간질을 시키는가” 라는 시와 함께 보냈다.
‘상촌집’ (象村集) 작자 신흠은 이를 보고 “허씨는 시에도 능하고, 기질도 호방함을 알게 되었다” 고 평했다. 그러나

조선여성에게 호방한 기질은 불행의 씨앗일 뿐이었다. 그녀는 시를 통해
부부관계를 한 차원 높게 승화시키려 했으나 이 또한 비난의 대상이 됐다.
‘강남에서 독서하는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 (寄其夫江含讀書)란 시에서
“규방에서 기다리는 마음 아프기만 한데 /
 풀이 푸르러도 강남 가신 님은 오시질 않네” 라고 노래하고,

시 ‘연꽃을 따며’ (采蓮曲)에선
“물 건너 님을 만나 연꽃 따 던지고 /
 행여 누가 봤을까 한나절 얼굴 붉혔네” 라고 남편에 대한 수줍은 애정을 노래
했다. 하지만 훗날 이수광이 ‘지봉유설’ 에서 “이 두 작품은 그 뜻이 음탕한 데 가까우므로 시집에 싣지 않았다” 고 평했다. 사부곡(思夫曲)까지 음탕으로 몰아부치는 조선에서 여성의 모든 적극성은 비난받았다. 게다가 과거에 거듭 낙방한 김성립은 기방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허난설헌은 이런 왜곡된 현실과 맞서기
위해 시를 무기로 선택했다. 허난설헌은
“누가 술 취해 말 위에 탔는가 /
 흰 모자 거꾸로 쓰고 비껴 탄 그 꼴”
이라는 ‘색주가의 방탕한 사람에 대한
노래’ (大堤曲)로 남편을 풍자했다.

그녀는 여성이 남성을 위해 존재하는
부차적 존재가 된 것이 문제의 근원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인생의 운명이란 엷고 두터움 있는데 /
 남을 즐겁게 하려니 이 내 몸이 적막하네” 라고 읊은 시 ‘한정(恨情)’ 은 그런 인식의
표현이다.

그녀가 시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시어머니에게 미움 받은 그녀가 의지할 곳은 두 아이뿐이었다. 그러나 그 아이들에게 비극이 잇달았다.
“지난해는 사랑하는 딸을 잃더니 /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 잃었네 /
슬프고 슬프구나 광릉(廣陵:아이들 묻힌 곳) 땅이여 /
두 무덤 마주보고 서 있구나”
(자식을 애곡함 · 哭子) 라는 시는 불행이 거듭되는 운명에 대한 통곡이었다.

그녀는 시로써 조선의 사대부를 조롱하고 모순된 사회에 저항했다. 또한 여성에
대한 억압과 빈자에 대한 불평등을 동일시하는 강한 개혁지향성을 드러냈다.
“양반댁의 세도가 불길처럼 성하던 날 /
고루(高樓)에선 노래 소리 울렸지만 /
가난한 백성들은 헐벗고 굶주려 /
주린 배를 안고 오두막에 쓰러졌네”
(느낌을 노래함 · 感遇)란 시는 가난한 백성들의 질곡에 대한 분노였다.

“밤새도록 쉬지 않고 베를 짜는데 /
뉘집 아씨 시집갈 때 옷감 되려나 /
손으로 싹둑싹둑 가위질하면 /
추운 밤 열 손가락 곱아오는데 /
남 위해 시집갈 옷 짜고 있건만 /
자기는 해마다 홀로 산다네.”
시 ‘가난한 여인을 읊음’ (貧女吟)은 시인의 직관으로 간파한 소외론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시를 통한 현실 변혁의 한계를 절감했다. 그녀의 분노는 시로
쓰여지는 것 이상의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시는 현실을 넘어
피안의 세계로 다가간다. 도교의 세계였다. 장시 ‘신선이 노니는 노래’ (遊仙詞)나 ‘꿈에서 광상산에서 시를 지으며 노닌 이야기’ 등이 그런 글들이다.

그녀가 남긴 시들이 허균에 의해 ‘난설헌집’(蘭雪軒集)으로 간행되고,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에 의해 중국에서 출간되면서 “이 넓은 세상에서 왜 하필이면 조선에 태어났을까” 란 첫 번째 한은 풀렸다. 훗날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 에서
“규중 부인으로서 시를 읊는 것은 애초부터 아름다운 일은 아니지만, 외국(조선)의 한 여자로서 꽃다운 이름이 중국에까지 전파되었으니 가히 영예스럽다고 이르지 않을 수 없다” 라고 말한 것처럼 사대(事大)의 나라 조선의 남성들은 명나라를 통해 역수입된 그녀의 명성을 거부할 수 없었다. 1711년에는 분다이야(文台屋次郞)에 의해 일본에서도 시집이 간행됐다. 그녀가 남긴 시들은 여성 차별의 왕국,
조선의 영역을 넘어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것은 모순으로 가득찬 사회에 대한 그녀의 승리이기도 했다.

 [허난설헌 - 허균 남매]
    요절한 누이 시 모아 ‘난설헌집’ 펴내


허난설헌이 조선 여인으로서 호를 남긴, 이례적 인물이 된 데에는 동생 허균의
노력이 절대적이었다. 난설헌이 요절하자 허균은 친정에 흩어져있던 누이의 시와 자신이 외우고 있던 시를 모아 ‘난설헌집’ 를 펴냈다.

이 때 여러 사람의 발문을 받았는데, 유성룡은 “이상하도다. 부인의 말이 아니다”라는 감탄을 남겼다. 명나라 사신 주지번에게도 발문을 받았는데 그녀의 시에
감탄한 주지번은 “‘유선사’ 등 여러 작품은 중국 시의 전성기였던 당나라 시인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라는 극찬과 함께 이를 중국에서 출간해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조선인 역관 허순과 중국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한 소녀는 이 시집을 보고 ‘난설헌을 사모한다’ 는 뜻의 경란(景蘭)으로 이름을 바꾸고
“내가 바로 난설헌이 다시 태어난 몸이다” 라고 말할 정도로 심취했다.

불교와 도교에 심취하고 나중에는 천주교 기도문을 가져올 정도로 정형화된 사고를 거부했던 허균이기에 ‘난설헌집’ 을 남기고 ‘홍길동전’ 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바로 특출한 성격때문에 광해군 10년(1618) 역모 혐의로 능지처참을 당하고 말았다. 박제된 삶을 거부한 남매의 비극이자, 조선의 비극이었다.

※다음편은 고구려와 백제를 개국한 ‘창업전문가’ 소서노 입니다.
(이덕일·역사평론가. 2002.4.9 )

         다시 읽는 여인열전 6          


  고구려-백제開國 숨은주역 소서노(召西奴)

       주몽을 전문경영인 삼아 고구려 세운 ‘킹 메이커’



개국을 다른 말로 천명(天命)이라고 한다.
이성계가 파옥(破屋)에 들어가 세 서까래를 지는 꿈을 꾼 것이 임금이 될 천명으로 전해지는 것은 개국의 어려움을 말해준다. 그런데 우리 역사에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나라를 창업한 인물이 있다. 소서노(召西奴)라는 여성이다.

2000여 년 전 만주 졸본천(卒本川 · 중국 요녕성 혼강)에 살던 소서노(召西奴)에게 객관적으로 미래는 없었다.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었던 전남편 우태는 졸본
지역의 유력한 토착세력이었지만 이미 사망했고, 그녀는 두 아들 비류 · 온조만
둔 과부였기 때문이다. 전쟁이 일상화된 고대사회에서 여성에게 사회적 역할은
주어지지 않았다.

이때 그녀는 북부여에서 망명한 주몽을 만난다. 기원전 37년 경 스물 아홉의
소서노와 부여에 임신한 부인 해씨를 두고 망명한 스물 한살의 주몽의 만남이
회오리를 몰고 올 줄은 아무도 몰랐다. 북부여왕 해부루의 손부(孫婦) 소서노에게 북부여에서 망명한 주몽은 시가의 정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과거의 악연보다는 미래를 위해 주몽과 손을 잡았다.

그녀는 당시 졸본 지역의 시대적 과제는
통합에 의한 국가 창업이라고 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이 과제를 수행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주몽을 내세워 졸본의 토착세력들을 통합해 나갔다. 처음에 졸본의 토착세력들은 주몽을 무시했다.

오이 · 마리 · 협보라는 세 부하만 데리고
부여에서 도망친 주제에 천제(天帝)의 아들이자 하백(河伯 · 물의 신)의 외손이라고
떠벌이는 주몽을 달갑게 보는 토착세력은 없었다. 그러나 소서노는 토착세력의 눈으로 주몽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녀 자신이
토착세력의 대표 연타발의 딸이었지만, 정체된 현실에 만족하는 기득권자의 시각이 아니라 졸본의 변화를 추구하는 도전자의 시각으로 주몽을 바라보았다.

주몽이라는 이름 자체가 명사수라는 뜻일 정도의 뛰어난 무술과 부여왕의 말을
기르며 준마를 굶겨 마르게 만든 뒤 자신이 차지한 명석한 두뇌, 그리고 북부여라는 기존의 터전을 과감하게 버리고 망명한 벤처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주몽이 지닌 이런 콘텐츠를 높이 산 소서노는 그를 과감하게 CEO로 등용했다. 졸본의 변화를 추구하는 소서노와 벤처정신의 소유자 주몽의 결합은 엄청난 폭발력을 발휘했다.

소서노가 없었다면 스물 한 살의 망명객이 토착세력의 텃세를 극복하고 고구려를 건국하기는 불가능했다. 고구려는 말하자면 소서노라는 자본주가 주몽이라는 전문경영인을 영입해 건국한 신흥 국가였다. ‘삼국사기’ 백제건국기사에 “주몽이 나라의 기초를 개척하며 왕업을 창시함에 있어서 소서노의 내조가 매우 많았으므로 주몽이 소서노를 특별한 사랑으로 후대(厚待)했고 비류 등을 자기 소생처럼 여겼다” 라는 기록은 여성에게 인색한 ‘삼국사기’로서는 이례적이다. 그만큼 고구려 창업에 소서노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고구려를 창업한 그녀의 공은 기원전 19년 부여에서 주몽의 아들 유리가 찾아오면서 부인된다. 고구려는 해씨와 유리가 아니라 소서노가 두 아들 비류 ·
온조와 함께 세운 나라였음에도 후계자는 유리가 된 것이다. 이때 소서노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하나는 유리왕과 권력투쟁에 나서는 것이었다.
유리왕은 졸본 지역에 자기 세력이 전무했다. 토착세력인 소서노가 두 아들과 손잡고 유리왕 축출에 나선다면 그가 승리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소서노는 내부 다툼 대신 다른 길을 선택했다. 새로운 나라 창업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장남 비류가 그녀의 뜻에 동조해 동생 온조를 설득했다.

“처음 대왕께서 부여에서 난을 피해 이곳으로 도망 오셨을 때 우리 어머니께서
가진 재산과 노력을 모두 기울여 나라를 세우도록 도왔다. 지금 대왕이 세상을 떠나신 이후 나라가 유리에게 돌아갔다. 우리가 여기에서 불필요한 혹처럼 우울하게 지내느니 차라리 어머님을 모시고 남쪽 지방으로 가서 좋은 땅을 선택해 나라를
세움만 같지 못하다.”

‘삼국사기’ 는 이때 오간 · 마려 등 열 명의 신하와 많은 백성들이 따랐다고 기록
하고 있는데 이는 그만큼 소서노의 세력이 막강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만주를
떠나 한반도로 남하한 소서노는 푸르게 넘실대는 한강을 보고 새 나라의 도읍지
임을 직감했다. 그러나 장남 비류는 바닷가가 새로운 도읍의 적지라고 주장했다.
소서노는 아들에게 얽매이지 않았다. 그녀는 장남 대신 차남 온조와 한강 유역에 하남 위례성(河南慰禮城 · 서울 풍납토성)을 쌓고 새 나라를 창업했다. 한반도와 일본, 그리고 요서를 아우르는 해상왕국 백제는 이렇게 시작됐다.

소서노는 온조와 함께 백제의 기틀을 잡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낯선 망명객 주몽과 함께 고구려를 건국했던 그녀의 경험과 능력은 백제 창업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한강 유역을 도읍지로 정한 그녀의 선택은 미추홀을 선택한 비류가 습하고 물이 짜서 백성이 편하게 살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후회했다는
점에서도 탁월함이 입증된다.

‘삼국사기’ 온조왕조 13년 (서기전 6년)은 “왕모(王母)가 61세에 세상을 떠났다” 고 기록하고 있는데 ‘삼국사기’ 에 왕모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극히 희소하다는 점에서 소서노의 위상을 짐작하게 해 준다. 비록 고구려 개창의 공은 남편 주몽에게, 백제 개창의 공은 아들 온조에게 돌아갔지만 이 두 나라의 창업에 소서노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남성 중심의 역사관 때문에 그녀의 이름은 역사서에서 점차 지워져 그 편린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삼국사기’ 가 일설(一說)로서 그녀의 이름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 자체가 소서노의 활약상을 짐작하게 해준다.

무력이 모든 것을 결정짓던 고대시대에 여성의 몸으로 국가를 창업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것도 한 나라가 아니라 두 나라를 개창한 인물은
세계 역사에도 그 유례가 드물다. 남성우월주의에 밀려 우리 역사에서조차 묻혀
졌지만….

 [비류백제]
    마지막 왕 응신, 일본 15대왕 됐단 주장도



‘삼국사기’ 온조왕조에는 미추홀을 도읍지로 선택한 비류가 위례성으로 돌아와
부끄럼 속에 죽은 것으로 기록돼있다. 하지만 비류에 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은 비류백제가 상당기간 존속했기 때문이다. 비류백제의 도읍지에 관해서는 그간 많은 논란이 있어왔는데 인천의 문학산이라고 보는 주장이 가장 일반적이다.
문학산 꼭대기에 비류 백제의 도읍지터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인천을 미추홀로도 부르는 것은 비류백제의 도읍지라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농학자이자 사학자인 김성호씨는 비류백제의 도읍지를 아산만 지역으로
비정했다. 특히 그는 비류백제의 마지막 왕인 응신(應神)이 서기 396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공격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가 15대 일왕이 됐다며 일본 왕가의 뿌리를 비류백제와 연결시키고 있다.

(이덕일·역사평론가. 2002.4.16 )

         다시 읽는 여인열전 7          


  정략가를 택한 혜경궁 홍씨

        "정치색 다르다" 남편도 정적 삼은 냉혹한 승부사


홍씨 소녀는 불과 아홉 살 때 세자빈에 간택됐지만 자기 임무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 홍봉한(洪鳳漢)이 언니의 혼수를 헐면서까지 간택에 임하게 한 것은 낙과(落科)를 거듭한 인생의 전환을 위해 승부수를 던진 것이었다. 과연 간택 다음해 홍봉한은 별시에 합격해 국왕의 사돈이 된 혜택을 만끽했다. 장인의 합격사실을 알려주며 기뻐할 때만 해도, 사도세자는 장인이 정적으로 등장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혜경궁 홍씨(1735∼1815)는 세자가 대리청정한 지 3년째인 1752년(영조 27)에 정조를 낳아 지위를 튼튼히 했고, 홍봉한은 고속승진을 계속했다. 혜경궁은 부친을 따라 노론 당인이 되었는데, 세자빈이란 위치는 당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게 만들었다. 그러나 세자가 점차 반노론, 친소론의 정치성향을 갖게 되면서 행복한 날은 끝났다. 영조 31년 나주 벽서사건은 소론 온건파의 제거와 탕평책의 붕괴를 뜻했고, 소론을 지지하는 세자는 고립되어갔다. 급기야 노론은 세자 제거를 당론으로 확정했다.

노론 영수 홍봉한은 세자빈에게 당론을 따르라고 요구했다. 세자 대신 세손(정조)을 세우겠다는 약속을 세자 제거의 명분으로 삼았다. 그녀는 세자에게 가는 정보를 통제하고, 세자에 대한 정보를 노론에 제공했다. ‘한중록’에서 그녀는 영조의 연설(筵說:경연 중에 한 말)이 사도세자에게 들어가기 전에 특정한 부분을 고치거나 “ (자신이)내관에게 친히 말해 빼버리게 하고 이 사연을 선친께 기별했다 ” 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혜경궁에게 세자는 정적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정치적 역할을 냉혹하게 수행했다.

안팎으로 고립된 세자가 후견자로 택한 인물이 소론 영수 조재호(趙載浩)였던 점은 세자 부부의 비극적 관계를 극대화시켜 보여준다. 조재호는 형수 효장세자 빈의 오빠였던 것이다.

홍봉한·홍계희 등 노론영수들은 노론 윤급의 청지기 나경언(羅景彦)을 매수해 세자를 역모로 고변하는 승부수를 던진다. 고변을 들은 영조는 “오늘 조정 신하들의 치우친 논의가 부당(父黨:영조의 당)·자당(子黨:세자의 당)이 됐다” 고 한탄한다. 사도세자 사건의 본질을 말해주는 사례다.

세자는 장인뿐만 아니라 아내인 혜경궁까지 자신을 제거하는데 가담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세자가 학질을 핑계로 죽음에서 벗어나려 세손의 휘항(揮項:방한모)을 요구하자 혜경궁은 세손 것은 작다며 당신 것을 쓰라고 대답했다. 이에 세자는 “자네가 참 무섭고 흉한 사람일세. 자네는 세손 데리고 오래 살려 하기에 오늘 내가 나가서 죽겠기로 그것을 꺼려 세손 휘항을 안 씌우려는 심술을 알겠네” 라고 말한다.

영조에게 ‘뒤주’ 에 관한 아이디어를 제공한 인물은 홍봉한이었다. 세자가 뒤주에 갇혀 신음하는 여드레 동안 혜경궁은 세자를 구하기 위한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다급해진 세자가 뒤주에 갇히기 직전 조재호를 부른 사실을 홍봉한에게 알렸다. “한쪽 사람들(노론)이 모두 세자에게 불충했으나 나는 동궁을 보호하고 있다” 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죽게 만든 것이다.

혜경궁은 자신의 아들인 세손에게 위협이 몰리자 당과도 맞섰다. 뒤주에서 죽은
세자의 아들에게 대권을 줄 수 없다고 판단한 노론은 세손 제거를 당론으로 정했다. 크게 반발한 혜경궁은 세손 제거 작업을 주도하는 숙부 홍인한에게 편지를 보내 중지를 요구했고, 당내에 상당한 지분이 있는 혜경궁의 반발은 노론의 일사분란한 당론 집행을 어렵게 했다.

▲ 정조가 뒤주에서 죽음을 맞은 아버지 사도
세자를 모신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의 융릉.
혜경궁의 의도대로 1776년 정조는 임금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모친과는 다른 정견을 갖고 있었다. “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는 즉위 일성과 함께 정조는 부친
비극의 단죄에 나섰는데 이는 곧 외가에 대한 공격을 뜻했다. 정조 즉위 직후 동부승지 정이환(鄭履煥)이 홍봉한과 홍인한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리고,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들이 “홍봉한의 한 가닥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는 군신 상하가 편히 먹고 잘 수 없다” 고
가세했다. 홍인한과 정후겸 등은 사형 당하고 김귀주 등은 유배가는 등
과거사 청산작업이 수행되었다.

혜경궁은 이런 청산작업 속에서 부친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힘을 다 쏟았다.
“자궁(慈宮)께서 요즘 수라를 드시지 않고 침수(寢睡·잠자리)가 편치 못하다” 는
정조의 말대로 그녀는 아들을 상대로 단식투쟁도 불사했다. 그러나, 혜경궁의 친정은 완벽하게 몰락했고, 재위 24년 만에 정조가 죽고 손자 순조가 즉위하자 비로소 친정 재건에 나섰다. 그녀는 사도세자 사건을 자신과 가문의 자리에서 정리할
필요성을 느끼고 ‘한중록’ 을 저술했다.

혜경궁은 ‘한중록’ 에서 정조가 자기 칠순(갑자년) 때 친정을 복권 시키기로 약속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정조의 이런 말을 들은 사람은 달리 아무도 없었다. 갑자년에 친정을 신원하려는 의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도세자의 비극은 정신병자인 세자와 정신병자에 가까운 이상성격자 영조 사이의 충돌의 결과이지 자신의 친정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한중록’의 메시지는 후대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됐다. 역사에 던진 그녀의 마지막 승부수는 성공한 셈이다.

 [正祖 독살설]
  재위 24년 갑작스레 승하 … 정적 정순왕후만 임종 지켜봐



정조가 승하하자 영남 남인들 사이에서는 정조독살설이 급속도로 확산됐다.
노론 대신 남인들을 정치 파트너로 삼으려던 시점에서 급서한 것이 원인이었다.
정조는 재위 12년 남인 채제공을 우의정에 발탁했는데, 무려 80여 년 만의 남인 정승이었다. 이에 고무된 영남 남인들은 같은해 자신들이 과거 이인좌의 반군에
호응한 것이 아니라 맞서 싸웠다고 주장하는 ‘무신창의록’ 을 우여곡절 끝에 정조에게 바쳤다.

정조는 재위 16년 남인의 종주 이황을 모신 도산서원에서 별시를 실시, 영남인
등용금지의 원칙을 깼다. 이날 별시장에 입장한 유생은 7200명이 넘었고,
거둔 답안지는 3600장이 넘었다. 정조는 영남 남인과 하나가 되어갔다.

정조는 재위 24년 6월 14일 내의원 제조 서용보 등을 편전으로 불러 종기에 대한 진찰을 받는 것으로 시작해 약 보름 동안 투병했다. 정조는 종기와 자신이 ‘가슴
속의 화기’ 라고 말한 홧병으로 신음하다 6월 28일 사망한다. 그의 독살설을 뒷
받침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필자가 ‘누가 왕을 죽였는가’ 에서 쓴 대로 정조의
정적이었던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김귀주의 동생)만이 그의 임종을 지켜보았다는 사실에 있다. 혼수상태에 빠진 정조에게 그녀가 어떤 일을 했는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덕일·역사평론가. 2002.4.23 )


         다시 읽는 여인열전 8          


  ‘국왕도 마음대로 갈아치운 미실

        미색으로 왕권 조종 … ‘一夫從事’ 받은 신라 여걸




32명의 대표화랑 풍월주에 관한 신라 역사서 ‘화랑세기’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주인공은 뜻밖에도 미실이란 여인이다. 6세기 후반 신라 사회를 뒤흔든 미실은
화랑 사다함의 억울한 죽음과 맞닥뜨릴 때까지만 해도 대원신통 계급으로서 운명에 순응하는 여인에 불과했다. 미실의 외할머니 옥진을 종주로 삼는 대원신통은
옥진이 법흥왕을 모신 것처럼, 임금에게 색공(色供)을 바치는 것이 존재이유인 계급이었다. 미실에게 남성을 사로잡기 위해 ‘교태를 부리는 방법과 가무를 가르친’ 장본인은 바로 옥진이었다.

미실은 얼굴이 아름답고 몸은 풍만하며 성격도 명랑해서 ‘화랑세기’ 에 “세 가지
아름다움의 정기를 모았다”고 기록된 여인이었다. 지소 태후가 미녀들을 궁중에 모아놓고 아들 세종 전군(殿君·왕이나 태후의 아들)에게 부인을 고르라고 했을 때 세종이 미실을 선택한 것은 당연했다. 미실은 옥진에게 배운 전문적 방사기교로
세종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지소 태후가 진흥왕의 왕비 사도를 폐하고 숙명공주를 세우려다 실패한
사건의 여파가 미실에게 향하면서 그녀의 운명은 달라져갔다. 미실이 사도 왕후의 조카란 사실을 미워한 지소태후는 “네게 전군의 의복과 음식을 받들라고 했지
누가 색사(色事)로 어지럽히라고 했느냐” 며 미실을 쫓아낸 것이다.

하지만 미실은 사다함을 만나면서 죄없이 쫓겨난 억울함을 순수한 사랑으로 보답 받았다고 여겼다. 미실은 ‘부귀는 모두 한때’ 라며 사다함과 부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사다함과 함께 살려는 그녀의 소박한 결심은 실현될 수 없었다. 미실을 그리워한 세종 전군이 상사병에 걸리자 지소태후가 다시 불러 들였기 때문이다.
반면 가야와의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사다함은 미실이 다시 세종에게 간 것을 보고 상사병으로 죽고 말았다.

미실은 천주사(天柱寺)에서 사다함의 명복을 빌면서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기
위해선 권력이 잡아야한다고 느꼈다. 그녀는 먼저 사도왕후와 “삼생(三生 · 전생 · 현생 · 후생)의 일체가 될 것을 약속했다.”
사도 왕후는 대원신통에다가 미실의 숙모였기에 그녀와 쉽게 권력동맹을 맺을 수 있었다. 미실은 자신의 성적 매력을 이용해 권력장악에 나섰다.


사도 왕후는 미실에게 아들 동륜 태자와 사귀어 차기 왕후 자리를 노리라고 권유
했다. 이에 따라 미실이 태자의 아이를 임신했을 때 진흥왕의 부름을 받았다.
미실은 태자의 부친에게도 전문적 방사솜씨를 발휘했고 진흥왕은 ‘화랑세기’ 에서 “천하를 뒤집을 만큼 사랑했다” 고 표현할 정도로 그녀에게 반했다. 진흥왕이 전주(殿主)라는 지위를 내리자 문장을 지을 수 있었던 미실은 진흥왕 곁에서 직접 정사에 참여했다.

미실은 29년 전에 폐지된 원화(源花) 제도를 부활시켜 스스로 원화가 되었다.
남성 풍월주가 이끌기 전의 화랑도는 두 여성 원화가 이끌었으나 삼산공의 딸
준정(俊貞) 원화가 법흥왕의 딸 남모(南毛) 원화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해 폐지된 제도를 다시 부활시킨 것이었다. 이때 자리를 내준 풍월주는 다름 아닌 남편 세종이었다.

그러나 동륜 태자가 부친 진흥왕의 후궁 보명궁주의 담을 넘다가 큰 개에 물려
죽는 사건이 발생해 미실은 원화 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태자의 수행원들이 태자와 미실 사이의 스캔들을 폭로했기 때문이다. 미실은 이에 좌절하지 않고 풍월주 선정에 간여했다. 그녀는 남편 세종에게 양보를 강요해 자기 섹스파트너였던 설원랑을 풍월주로 만들었다.

진흥왕이 풍질(風疾)에 걸리자 왕권은 사실상 그녀가 차지했고 그녀는 자기 심복을 각지에 심었다. 진흥왕이 마침내 세상을 떠나자 미실은 사도 왕후, 세종, 동생 미생과 짜고 이 사실을 비밀에 부쳤다. 미실은 동륜의 동생 금륜과 먼저 정을 통하며 충성을 약속 받은 후 왕위에 올렸는데 그가 바로 진지왕이다. 그러나 진지왕은 막상 즉위하자 미실을 멀리하고 다른 여자들을 가까이 했다. 이를 약속 위반이자
대원신통에 대한 도전이라고 판단한 미실은 사도 태후와 짜고 그를 폐위시키기로 결정했다.

미실은 사도 왕후의 오빠 노리부와 남편 세종에게 거사를 맡겼는데 이 일에는
가야계 출신 화랑 문노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용감한 가야계 출신 낭도들이 진지왕을 지지하면 거사가 실패로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실은 문노보다 신분이 높은 동생 윤궁을 배필로 맺어줄 정도로 우대해왔기 때문에 문노는 거사에 가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진지왕은 폐위됐고, 진평왕이 뒤를 이었다. 신라사회는 이제 국왕까지 갈아치우는 현실적 힘을 가진 미실의 것이 되었다.

미실의 최후는 그녀의 진면목을 잘 보여준다. 진흥 · 진지 · 진평의 세 왕을 모신
그녀가 진평왕 28년(서기 606년) 병에 걸리자 설원랑은 자신이 병을 대신하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빌었다. 설원랑이 대신 죽자 미실은 자기 속옷을 넣어 함께 장사지내며 “나도 또한 오래지 않아 그대를 따라 하늘로 갈 것이다” 라며 슬퍼하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 나이 58세였다.

우리 역사에서 복수(複數)의 여성들에게 일부종사(一夫從事)를 시킨 남성은 많아도 복수(複數)의 남성들에게 일부종사(一婦從事)를 시킨 여성은 그녀가 유일하다. 그것도 절대적인 권력 속에서 자발적으로 ….



  [ 화랑세기 ] 1989년 필사본 공개…진위논쟁 계속
      ‘神國의 道’로 근친혼도 정당화



미실 얘기의 바탕이 된 ‘화랑세기 ’는 현재까지 필사본만 공개됐는데, 학계에선
아직 진위논쟁을 벌이고 있다. ‘화랑세기 ’는 신라의 김대문(金大問)이 신문왕 1년(681)에서 7년 사이에 저술한 책으로 ‘삼국사기 ’보다 무려 460여년이나 앞선다. 현재 공개된 필사본은 일본 궁내성 도서과 촉탁을 지낸 박창화가 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9년 필사본이 처음 공개됐을 때 위작 논쟁이 벌어진 이유 중의 하나는 근친상간도 서슴지 않는 난잡한(?) 남녀관계였다. 그러나 ‘화랑세기 ’는 이런 근친혼을 ‘신국(神國)의 도(道)’라는 고유한 개념으로 정당화하고있다. 22세 풍월주 양도는 이복누이와의 결혼을 권유하는 어머니 양명공주에게 “중국 풍습이 아니라 신라의 풍습을 따르겠다 ” 며 수락하는데 이에 대해 양명공주는 “참으로 나의 아들이다.
신국에는 신국의 도가 있다. 어찌 중국의 도로써 하겠느냐 ” 라고 칭찬한다.

진흥왕은 미실의 군주(君主·일종의 후궁)임명을 기념해 큰 잔치를 베풀고, 이를
기념해 연호를 대창(大昌)이라고 고쳤다. 당시 신라인들은 중국에서 전래된 유학이 아니라 신라 고유의 ‘신국의 도 ’ 를 신봉했던 것이다. 현대인들은 ‘신국의 도 ’ 라는 프리즘을 통해야 미실과 신라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이덕일·역사평론가. 2002.04.30
**배경음악/가는세월/반주곡 **

 

 


         다시 읽는 여인열전 9          



  신분사회에 맞선 장희빈

        政爭이용 중전에 오른 '여종의 딸'


소녀 장옥정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숙부 장현(張炫)은 비록 중인
(中人)이었지만 ‘숙종실록’ 에 ‘국중(國中)의 거부’ 로 기록될 정도로 부자였다. 그런데 서녀(庶女)였던 장옥정 자신은 종모법(從母法·자식의 신분은 어머니를 따르는 법)에 따라 천인이었다. 어머니 윤씨가 조사석 집안의 여종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돈을 주고 속환(贖還)받아 여종 신세는 벗어났지만 천인
딱지는 뗄 수 없었다. 양반가의 여종 출신으로 중인의 첩이 된 어머니 윤씨의 신산스런 삶이 자신의 미래였다.

장씨는 이런 신분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일도 마다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그녀가 궁녀가 된 것은 다른 여성들처럼 호구를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녀의 숙부 장현은 남인 계열 종친 복창군과 함께 유배된 적이 있을 정도로 정치색이 강한 인물이었고 사실상 남인 당인(黨人)이기도 했다. 장현이 장옥정을 입궁시킨 것은 남인 정권획득의 일환이었다. 남인의 후원으로 자의대비전 나인(內人)이 된
장옥정은 대비의 후원으로 그리 어렵지 않게 숙종을 만날 수 있었다.

열 한 살 때 얻은 동갑 부인 인경왕후 김씨를 잃어 외로움에 젖은 스무 살(1680년) 청년 숙종이 실록에 ‘자못 얼굴이 아름다웠다’ 고 기록된 미녀 옥정에게 빠져든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옥정은 후궁에 봉해지기도 전에 숙종의 모후 명성왕후 김씨에게 강제로 쫓겨났다. 명성왕후는 옥정이 남인의 간자(間者)라는 서인들 주장을 사실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옥정은 이듬해(1681년) 숙종과 서인 영수 민유중 딸의 국혼 소식을 궐밖에서 들어야 했다.

그녀의 하염없는 기다림은 2년 후인 숙종 9년(1683) 명성왕후 김씨가 41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끝났다. 복상 기간이 끝나자마자 입궁한 그녀를 숙종은 내명부
종4품 숙원에 봉했다. 정식으로 후궁이 된 옥정은 남인의 계획대로 인현왕후 민씨와 대결했다. 서인들이 편찬한 ‘숙종실록’ 은 곳곳에서 인현왕후의 부덕(婦德)과
장씨의 패덕(悖德)을 비교하고 있지만 민씨가 장씨의 종아리를 친 사실이 기록돼 있을 정도로 민씨의 격렬한 질투가 행간에 남아있다. 숙종은 명문가 출신 민씨가 아니라 여종의 딸을 더 총애했다. 후궁 장씨에 대한 서인들의 증오는 증폭됐다.
서인들은 숙종 13년 6월에 발생한 수해를 장씨 탓으로 돌리고, 조사석이 장씨
모친 윤씨의 애인이기 때문에 우의정에 제수됐다는 말까지 지어냈다.

그러나 장씨는 서인들의 이런 저주를 비웃기라도 하듯 숙종 14년 10월 아들을 낳았다. 그러자 이 아이가 왕이 될 지 모른다고 판단한 서인들의 반응은 더욱 격렬해졌다. 서인 소속의 사헌부 관리들은 장희빈의 산후 조리를 돕기 위해 궁중에 들어오는 모친 윤씨의 옥교(屋轎:지붕이 있는 가마)를 빼앗고 꾸짖었다. 장씨는 이를 갓난 왕자에 대한 공격이자 왕권에 대한 도전이라고 판단했다. 숙종은 서인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갓난 왕자를 원자로 정해, 자신의 후사임을 내외에 천명했다. 그런데 이미 종묘 고묘까지 마친 이 사안에 대해 서인 영수 송시열이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로써 숙종과 서인 사이에는 화해할 수 없는 기류가 흘렀다. 숙종은
재위 15년 서인들을 내쫓고 남인들을 등용하는 기사환국(己巳換局)을 단행했다. 나아가 서인 계열 왕비 민씨까지 쫓아냈다.

숙종 16년(1690) 10월 여종의 딸인 장씨는 드디어 왕비 자리에 올랐다.
서인 명문거족들과 맞서 거둔 승리였다. 서인 영수들은 불귀의 객이 됐다. 남인들이 장악한 조정에서 원자는 당연히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적으로 돌린 상대는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쫓아낸 적이 있는 서인이었다. 송시열이 사사(賜死) 당하던 날 서울의 남문 밖 우수대(禹壽臺)에는 천여 명이 넘는 서인 사대부들이 모여 눈물을 흘렸는데, 이 눈물은 장씨와 남인에게 향하는 것이었다.

숙종 19년 무렵 궁녀 최씨가 숙종의 승은(承恩:임금을 밤에 모심)을 입은 것을
계기로 서인들은 정권탈환에 나섰다. 최씨 역시 장씨처럼 미천한 신분이었는데,
궐 밖의 폐비 민씨가 그녀를 서인으로 포섭했다. 최씨가 숙종 20년 연잉군(延▩君:훗날의 영조)을 낳자 서인들은 본격적인 행동을 개시했다. 폐비 민씨와 귀인 김씨, 숙안공주 · 숙명공주 등 명문거족들은 막대한 정치자금을 제공했다. 숙종 20년(1694) 3월 말 서인들의 이런 움직임을 간파한 남인들이 서인들을 역모로 고변하자 서인들도 남인들을 역모로 맞고변했다. 숙종은 4월 1일 비망기를 내려 남인들을 전격적으로 축출하고 서인들을 등용했다. 이것이 갑술환국(甲戌換局)이었는데 이후 기사환국과 똑같은 상황이 전개되었다. 숙종은 왕비 장씨를 별당으로 내쫓고 폐비 민씨를 불러들였다. 남인들이 쫓겨난 조정에서 후궁으로 격하된 장씨가 기댈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숙종 27년 인현왕후가 3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장씨는 재기를 꿈꿨다.
서인들은 장씨의 목숨을 끊어놓지 않으면 언제 기사환국과 같은 일이 재발할지 모른다고 판단했다. 서인들은 숙빈 최씨를 시켜 ‘민비의 죽음은 장희빈의 저주 때문’이라고 밀고하게 했다. 숙종은 장씨를 희생양으로 삼기로 결심했다. 그는 장씨가 중전을 한번도 문병하지 않고,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설치해 저주했다고 비난하면서 자결을 명령했다.

14세의 세자가 대신들에게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빌었다. 그러나 노론 좌의정
이세백은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리는 세자를 외면했다. 여종의 딸로 신분제에 맞섰던 장씨는 당쟁을 이용해 왕비까지 올랐으나 역시 당쟁 때문에 비참하게 생애를
마감하고 말았다. 남은 것은 증오였고 그에 따른 보복의 비극뿐이었다.

  장희빈의 아들 경종 / 재위 4년만에 숨져 독살설

▲ 장희빈 소생인 경종과 아내 선의왕후
어씨의 능.  서울 성북구 석관동에 있다.
장희빈 소생인 세자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서인들은 이후 세자를 제거하려는 노론과
보호하려는 소론으로 나뉘었다. 최씨 소생의 연잉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던 숙종은 재위 말년 노론 영수 이이명과 세자 교체를 논의했다. 하지만 소론의 반발 때문에 실패하고 세자가 끝내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경종이다.

노론은 즉위 초부터 경종을 윽박질러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케 하고, 나아가 왕세제 대리청정을 밀어붙이다가 소론 강경파
김일경 등에게 역습을 당해 정권을 빼앗겼다. 그 후 노론이 경종을 살해하려 했다는 고변이 이어지면서 많은 핵심당인들이 사형 당했다.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노론이 독살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연잉군이 임금(영조)에 즉위한 지 4년 후(1728) 이인좌 등은 경종의 복수를 다짐하며 군사를 일으키기도 했다.
정치 보복이 보복을 낳는 악순환의 계속이었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2002.05.14)
● 다음은 봉사와 희생으로 살다간 소설 ‘상록수’ 의 모델, 최용신.



         다시 읽는 여인열전 10          


  신민지 농촌과 결혼한 최용신


        한 남자의 아내보다 '민중의 여왕' 택해





여고생 최용신(1909∼1935)은 거울을 볼 때마다 자신의 운명을 원망했다.
시원한 윤곽의 얼굴 형태나 다소 오뚝한 코, 그리고 상대를 빨아들일 듯한 검은
눈망울 등은 전통적인 조선 미녀였지만 심하게 얽은 마마 자국은 이런 모든 장점
들을 ‘곰보’ 라는 비어(卑語)로 덮어버리고도 남았다.

그녀는 공부에서 탈출구를 찾았다. 원산의 누씨(樓氏) 여자보통학교까지 10여 리 길을 통학하며 점심까지 굶어가며 공부했고, 성적은 최우등이었다. 당시 이화, 배화 등과 어깨를 견주던 누씨여고(선교사 루시 컨닝김의 이름을 딴 학교)에 가서도 1등은 여전했다. 백마를 탄 멋진 남성에게 여왕 대접을 받고 싶은 꿈이 그녀에게도 있었지만 용신은 고민 끝에 결혼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대신 식민지 조선의 농촌과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한 남자의 아내가 되는 길을 포기하는 대신 조선의 모든 민중들의 여왕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 여왕은 권력이 아니라 다함 없는 봉사와 희생으로 오를 가장 낮은 자리였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발생했다. 같은 교회 청년 김학준이 청혼해 온 것이다. 한 남자가 자신을 따라 농촌운동에 일생을 거는 반려자가 되겠다는데 끝내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용신은 17세 때 김학준과 약혼하며 결혼은 농촌운동에 필요한 준비를 모두 갖추게 될 10년 후에 하기로 합의했다. 이를 위해 용신은 김학준을 일본으로 유학 보냈다.

1929년 여자협성신학교에 들어간 용신은 1학년 때 농촌운동에 나섰다. 황해도
수안군 천곡면 용현리가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 첫 번째 농촌운동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무한한 애정으로 다가간 그녀를 농민들은 희귀한 곰보 신여성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이듬해 경북 포항의 옥마동으로 다시 떠났다. 용현리의 실패는 옥마동에서의 활동을 성공으로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다.

농촌운동에 자신감이 생긴 그녀는 수원에서 인천쪽으로 40여 리 떨어진 샘골
에서 교사를 필요로 한다는 소식을 듣고 서슴없이 1년 남은 학업을 포기했다.
스물 세 살 때인 1931년 10월 용신은 운명의 마을 샘골(현 안산시 본오동)에 도착해, ‘나의 몸과 마음을 남김없이 태워 태고연(太古然)한 이 마을이 밝혀지기를’
기도하고 다음날부터 마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협력을 부탁했다.

첫 반응은 용현리처럼 얼굴이 얽은 신여성에 대한 냉소이거나 호기심이었다.
용신은 물러서지 않았다. 샘골과 그 주변 마을 주민들의 교육열이 높다는 사실에 착안해 교회를 빌려 학교를 시작했다. 일상에 필요한 한글, 산수, 재봉, 수예, 가사, 성서 등의 커리큘럼이 큰 호응을 받았다.

여세를 몰아 그녀는 강습소를 세우기로 결심하고 1932년 5월 ‘천곡(泉谷:샘골)학원건축발기회’를 조직할 수 있었다. 건축비가 부족하자 새벽부터 근처의 벌목하는 산에서 나무와 돌을 주워 나르고, 마을 사람들에게 새벽과 밤중의 자투리 시간에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이런 노력 끝에 1933년 1월 15일 낙성식을 갖게 되었으나 쌀 스무 가마에 해당되는 206원 89전이 적자였다. 그녀는 이런 적자에 낙심하기보다는 낙성식을 아동들의 학예회를 겸한 잔치로 치렀는데 이에 감동한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금했다. 이때 걷힌 217원 50전으로 정확하게 빚과 잔치비용까지 딱 떨어지자 모금한 사람들도 믿지 못하겠다고 농담했다.

강습소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110명의 재학생으로 성장했다. 그러자 일제의
방해가 시작되었다. 주재소에서 최용신을 호출하고 군청의 시학(視學)이 간섭하더니 급기야 강습소의 설비 불충분을 핑계로 60명 이상 재학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했다. 최용신의 활동을 당시 조선일보가 전개하던 ‘귀향 남녀학생 문자보급운동’ 이나, 동아일보가 전개하던 ‘브나로드(민중 속으로) 운동’ 의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고 제동을 건 것이었다. 결국 용신은 50명의 학생들을 눈물 속에서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용신은 이 학생들을 버리지 않았다. 그녀는 오전반과 오후반을 끝내고
야학에서 이들을 가르쳤다.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일년 열두 달 이런 생활을 계속한 ‘샘골의 둘도 없는 종이요, 또 둘도 없는 여왕’ 이 되어갔다.

이 와중에 약혼자의 믿음이 약해졌다는 소식이 일본에서 들려왔다. 그녀는 파혼도 생각했으나 자신이 일본으로 가 약혼자의 마음을 잡기로 했다. 고베(神戶) 여자신학교 사회사업과에 들어간 것은 귀국 후의 농촌운동을 위한 재충전이었다. 용신은 약혼자의 마음도 다시 잡았으나 도일 석 달만에 각기병에 걸리고 말았다. 고국에서의 영양실조와 중노동이 원인이었다.

용신은 반 년 만인 1934년 9월 귀국했는데 고향 원산에서 정양하려는 그녀를 샘골 사람들은 ‘누워만 있어도 좋다’ 며 모셔갔다. 약간 차도가 생기자 용신은 즉각 활동을 개시했다. 오전반·오후반·야학을 마친 후 10리가 넘는 야목리까지 가는 강행군을 계속했다. 그러나 YWCA에서 그간 계속하던 후원 중지를 통보하는 등 악재가 겹치자 그녀는 쓰러지고 말았다. 1935년 정초에 수원 도립병원으로 호송됐다.
창자가 창자 속으로 뒤집혀 들어가는 장중첩증(腸重疊症)이었다.

그녀는 장을 끊어내고 잇는 수술을 두 차례 받았으나 두 번 다 경과가 좋지 못했다. 죽음을 감지한 그녀는 “나는 갈지라도 사랑하는 천곡강습소는 영원히 경영하여
주시오… 샘골 여러 형제를 두고 어찌가나, 애처로운 우리 학생들의 전로를 어떡
하나… 유골을 천곡강습소 부근에 묻어주오” 라고 유언했다.

25년 6개월의 짧은 그녀의 생애는 1935년 1월 23일 국내 첫 여성사회장으로 마감했다. 그러나 그녀의 생애는 심훈의 소설 ‘상록수’ 와 류달영의 전기 ‘최용신 소전’ 으로 다시 살아나 우리 역사의 상록수로 떠올랐고, 진정한 여왕이 됐다.

▲ 경기도 안산시 본오동에 있는 최용신 묘.
그녀가 짧은 인생을 모두 바친 샘골 강습소
근처에 묻혔다./조선일보 DB사진
  소설 ‘상록수’ 와 ‘최용신 소전’

1935년 심훈은 최용신의 일생을 소설화 한 ‘상록수’ 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고,
한국 문학사에 확실하게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수원고등농림학교 출신의 박동혁과 주인공 채영신과의 연애 이야기 등이 사실과 다르다는 비판이 당시부터 있어왔다. 그래서 실제 수원고등농림학교를 나온 류달영은
스승 김교신의 권유를 받고 1939년 최용신의 전기인 ‘최용신 소전’을 썼는데, 이또한 1년에 4쇄를 찍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1942년 김교신과 함석헌 등이 주도한 ‘성서조선’ 사건 때
일제는 ‘최용신 소전’ 을 모두 압수했다. - (이덕일 역사평론가 2002.05.22)



         다시 읽는 여인열전 11          


  ‘안방의 제왕’ 인수대비


        “남편은 아내의 하늘이다” 남존여비 강요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쫓고 즉위한 1455년, 만 열여덟 살의 며느리 한씨도 비로소 세자빈이 됐다. 결혼 당시 남편은 대군 아들에 불과했으나 그녀는 이때 이미 시아버지가 임금이 되기 위한 포석으로 자신을 며느리로 삼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인수대비(1437~1504)의 아버지 한확(1403~1456)은 조선 제일의 중국통이었다. 태종 17년(1417) 명나라에 공녀로 간 그의 누나가 황제 성조(成祖)의 후궁이 된 덕분이었다. 성조는 한확에게도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이란 벼슬을 내리고,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했을 때는 조선인인 그를 사신으로 임명해 고명(誥命)을 줄 정도로 총애했다.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제거하는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때 한확이 수양 편에 선 것은 딸 때문이었다. 정난 1등 공신에 책봉된 한확은 수양대군의 의도대로 명나라에 가서 세조의 즉위를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한확은 귀국 도중 만주에서 사망했는데, “부음이 들리자 임금이 놀라고 슬퍼” 했지만, 세조의 즉위를 왕위 찬탈이라고 본 대부분의 백성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고, 이런 민심에 그녀는 상처받았다. 남편 의경세자가 세조 3년(1457) 만 1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는 더했다. 의경세자는 단종보다 한 달 전에 죽었는데도 세조가 단종을 죽였기 때문에
단종의 모후 현덕왕비의 저주를 받아 죽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의경세자의 죽음은 그녀가 꿈꾼 왕비의 길이 좌절됐음을 뜻했으나 10년 후에 기회가 찾아왔다. 세조의 후사인 예종이 1년 2개월의 짧은 재위 끝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만 세 살짜리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이 있었으나 한씨는 자기 아들에게 왕위를 넘길 자신이 있었다. 천하의 권신 한명회가 사돈이었다. 한명회는 예종의 장인이기도 했으나 세 살 짜리 손자 대신 열 두 살짜리 사위 자을산군(성종)을 선택했다. 성종보다 세 살 위의 월산대군이 있었으나 그에게는 한명회같은 장인이 없었다. 한명회와 밀약한 세조의 부인 정희왕후가 세조의 유명이라는 명분을 댔으나 그런 말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대비의 말을 반박하고 나올 인물도 없었기에 한씨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은 임금이 될 수 있었다.

1469년 성종이 의경세자를 덕종(德宗)으로 추존하자 한씨도 왕후로 높여지고 동시에 대비가 됐다. 그녀는 조선의 모든 여성을 성리학 이념으로 무장시키는 것이 대비로서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성종 6년(1475) ‘내훈’(內訓)을 펴낸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 책에서 그녀는 “나라의 치란(治亂) 흥망(興亡)이 비록 남자에게 달려 있지만 부인의 착하고 그렇지 않음에도 연결돼 있으니 부인도 가르치지 않을 수
없다” 라면서 여성도 배울 것을 주장했다. 그녀가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 학문은
성리학이었는데, 성리학 이념은 남존여비(男尊女卑)라는 점이 문제였다.

그녀가 ‘내훈’ 의 「부부장」에서 “아내가 비록 남편과 똑같다고 하지만 남편은
아내의 하늘이다. 예로써 마땅히 공경하고 섬기되 그 아버지를 대하듯 할 것이다” 라고 말한 것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남편이라는 직책은 높은 것이 마땅하고 아내는 낮은 것이니, 혹시 남편이 때리거나 꾸짖는 일이 있어도 당연히 받들어야 할 뿐 어찌 감히 말대답하거나 성을 낼 것인가?” 라고도 했다. 그녀의 ‘내훈’ 은 남녀가 비교적 자유롭고 평등했던 고려시대의 유제가 남아 있던 조선 초기의 여성들을 강
하게 억압했고, 때로는 충돌했다. 인수대비와 며느리의 충돌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왕비 윤씨는 인수대비가 ‘내훈’ 에서 말한 “(남편에게는) 오직 순종할 뿐 감히 거스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는 말을 수긍할 수 없었다. 윤씨는 궁에 들어오기 전에 베를 짜서 팔아 늙은 어머니를 봉양할 정도의 효녀였지만, 남편 성종의 호색(好色)을 달게 받아들이는 열녀(烈女)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성종의 바람기에 제동을 걸면서 시어머니 인수대비와 갈등이 시작되었다. 야사에는 윤씨가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냈다고 전하지만, 정사인 ‘성종실록’ 에는 오히려 성종이 윤씨의 뺨을 때린 내용이 기록돼 있을 정도로 다툼의 진상은 분명치 않다.

그러던 중 후궁들과 성종의 총애를 다투던 왕비 윤씨의 처소에서 비상을 바른 곶감이 발견됐다. 곶감을 둘러싼 의혹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으나 인수대비는 성종이 아니면 후궁들을 죽이려는 의도로 단정지으면서 그녀는 위기에 빠졌다. 인수대비는 윤씨를 폐출시키려 했다. 왕비 폐출에 대해 명나라의 승인을 받는 것이 문제였으나 인수대비는 걱정하지 않았다. 고모 한씨가 선제(先帝)의 후궁으로서 황제의 효도를 받는 위치였으므로 사촌 한한을 사신으로 보내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윤씨는 비록 쫓겨났으나 원자의 생모였다. 폐출된 지 3년째인 성종 13년 시독관(侍讀官) 권경우(權景祐)가 경연에서 윤씨에게 처소를 장만해주자고 주장한 것을 계기로 그녀 문제가 다시 떠올랐다. 대사헌 채수(蔡壽)가 이 주장을 지지하자 성종은 “원자에게 잘 보여 훗날을 기약하려는 것“ 이라고 분노했으나 사태는 가라앉지 않았다. 삼대비(인수대비·정희왕후·안순왕후)는 한글 문서를 조정에 내려 윤씨가 “우리들이 바른말로 책망을 하면, 손으로 턱을 고이고 성난 눈으로 노려보았다“ 고 비난하고 나섰다. 하지만 6년 전 그녀를 왕비로 책봉하며 “정숙하고 신실하며 근면하고 검소한데다 몸가짐에 있어서는 겸손하고 공경하였으므로, 삼대비의 총애를 받았다“ 고 쓴 교명(敎命)과는 정 반대의 내용이었다.

민심은 인수대비의 성리학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폐비 윤씨의 억울함을 동정했다. 그러자 인수대비는 이런 여론에 정면으로 맞서 윤씨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결국
윤씨는 인수대비의 주도로 사약을 받았다. 연산군은 재위 10년째 드디어 복수에 나섰다. 성종의 두 후궁을 때려죽인 연산군의 분노는 인수대비에게 향해 “대비는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 라고 대들었다. ‘연산군일기’는 그녀가 연산군의 이런 모욕 때문에 ‘마침내 근심과 두려움으로 병나 죽었다’ 고 적고 있다.
연산군은 나아가 삼년상으로 치러야 할 국상을 한 달을 하루로 치는 역월제(易月制)로 25일만에 마쳐버려 확신으로 가득 찼던 대비의 인생을 조롱했다. 사랑이
최고의 이념인 줄 몰랐던 할머니와 용서가 최고의 무기인 줄 몰랐던 손자의 충돌이 초래한 비극이었다. 그 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의 모든 것이 부정되면서 그녀의
성리학 이데올로기는 조선 여성들이 받들어야 할 이념이 됐고, 조선은 극심한
남존여비의 나라가 되어 갔다.

  연산군 과 폐비 윤씨

윤씨가 사사당할 때 연산군은 만 세 살이었다. 야사들은 이에 착안해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를 어머니로 알고 지내던 연산군이 재위 10년(1504:갑자년) 임사홍의 소개로 외조모 신씨(申氏)를 만나 어머니의 비극을 알게되고 피의 복수에 나섰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연산군이 재위 1년 전라도 장흥에 유배되어 있던 외삼촌 윤구와 할머니 신씨를 석방한 것은 이 당시 이미 사태의 진실을 알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가 재위 초 어머니의 무덤을 회묘(懷墓), 또는 효사묘(孝思墓)라고 불렀던 것도 마찬가지 증거다. 그는 재위 10년 갑자사화 와중에 윤씨에게 제헌(齊獻)이란 시호를 바치고 회묘를 회릉이라 높였다. 그러나 연산군이 왕자(王者)의 가장 큰 복수는 ‘정사를 잘 하는 것‘이란 사실을 도외시한 채 소인의 복수에 집착하다 쫓겨나자 제헌왕후란 시호도 다시 사라지고 말았다.( 이덕일·역사평론가 2002.05.29)

● 다음편은 가야 제국의 공동 시조 허황후입니다.


         다시 읽는 여인열전 12          


  가야제국의 공동시조 허황후(許黃玉)


        “내 아들은 어미姓 따라야” 평등부부 선구자



아유타국의 열 여섯 살짜리 공주 허황옥(許黃玉)은 부모님의 꿈 이야기에 큰 충격을 받았다. 부모님이 동시에 같은 꿈을 꿨다는 것도 이상
했지만, 더 놀란 것은 꿈의 내용때문이었다.

“어젯밤 꿈에 상제를 뵈었는데 상제께서
‘가락국(금관가야)의 수로왕은 하늘이 내려보내서 왕위에 오르게 한 사람인데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그대들이 공주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 하라’ 고 말씀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셨다. 꿈을 깬 뒤에도 상제의 말씀이 귓가에 쟁쟁하니 거역할 수가 없다.”

그녀에게 이역만리 머나먼 가락국으로 출가하라는 얘기였다. 상제의 명령이라지만 허황옥은 이것이 허황된 꿈 이야기가 아니라 냉혹한 정치이야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유타국의 국익을 위해서 가야로 시집가야 하는 운명이었다. 당시 가야는 ‘삼국유사’「가락국기」에 신라의 탈해왕이 수로왕의 자리를 빼앗으려 했던 사실이 기록된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외부의 도전에 직면한 상태였다. 허황옥은 아유타국과 가야 사이 동맹관계의 상징이 될 것이었다.

허황옥은 기왕 가야하는 길이라면 단지 상징적 존재에 머무르고 싶지는 않았다.
수로왕의 부인이 아니라 허황옥 자신의 이름을 가야에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로왕의 부속물이 되어서는 안되었다. 수로왕과 자신은 평등한 부부사이가 되어야 했다.

허황옥은 부왕에게 자신과 가야에서 운명을 함께 할 잉신(▩臣:공주가 시집갈 때
따라가는 시신)들과 시종, 노비들을 떼어달라고 요청했다. 부왕은 신보(申輔)와 조광(趙匡)의 두 잉신과 시종, 노비들을 붙여줬다. 이처럼 집단을 이룬 그녀 일행은 배에 각종 비단과 의복, 피륙과 금·은·주옥(珠玉) 등의 패물을 가득 싣고 가야로 향했다.

허황후 일행을 태운 배는 긴 항해 끝에 목적지인 가야의 도두촌(渡頭村)에 도착했다. 그러자 도두촌이 내려다 보이는 망산도(望山島)에서 봉화가 피어올랐다. 그녀의 배를 보는 가야인들은 탄성을 흘렸다. 붉은 돛대에 붉은 깃발이 펄럭이는 신비로운 배였다. 보고를 들은 수로왕은 신하 구간(九干) 등에게 계수나무 노가 달린 배를 저어가서 대궐로 모시고 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허황옥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내가 본래 너희들을 모르는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따라갈 수 있느냐?”

허황옥은 가야의 신하들을 따라가서 수로왕을 만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신하가 아니라 수로왕이 직접 나와서 맞이하는 것이 평등 부부의 첫걸음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수로왕은 할 수 없이 대궐 아래에서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산기슭에 임시로 장막궁전을 만들어 놓고 기다렸다. 그제야 허황옥은 별포(別浦)
나루터에 배를 대고 상륙했다.

수로왕이 임시궁전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서두르지 않았다.
수로왕을 만나기 전 치러야 할 자신의 의식이 남아 있었다. 높은 언덕에 오른 그녀는 비단 바지를 벗어 산신령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을
제의 장소로 삼은 것은 의도적인 행위였다. 이는 자신이 건너온 바다신과 자신이
살아갈 토착신을 연결시키는 제의였는데 중보자는 물론 자신이었다.

제의를 마친 허황후는 비로소 수로왕이 기다리고 있는 장막 궁전으로 나아갔다.
그녀는 자신이 데려온 신하들을 수로왕에게 소개했는데, 이는 자기 세력과 수로왕
세력 사이의 연합을 제의한 것이었다. 수로왕은 허황후의 이런 의도를 알아차렸다. 수로왕은 “나는 공주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하들이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따르지 않았는데,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오셨으니 이 몸에는 매우 다행한 일이오” 라며 환영했다. 이는 수로왕이 허황옥의 연합제안을 수락해 토착세력인
구간 등을 제치고 허황후 집단을 가야의 왕비족으로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하늘에서 금줄을 타고 내려온 수로왕과 아유타국에서 붉은 깃발의 배를 타고 온 허황후가 배타적으로 가야 왕실을 구성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허황후는 아유타국에서 가져온 수많은 보물들을 백성들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자기 집단과 토착세력을 화학적으로 융합시켰다. 「가락국기」에 ‘허황후가 가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했다’ 고 기록된 것은 이런 상황을 전해주는 것이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온 나라 사람들이 땅이 꺼진 듯이 슬퍼했다’ 는 기록도 그녀가 토착민을 억압한 이주자가 아니라 토착민과 화학적 융합 속에서 금관가야의 공동시조가 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백성들은 그녀의 능을 수로왕이 금줄을 타고 내려온 구지봉(龜旨峯) 동쪽 언덕에 조성하고, 그녀의 ‘은혜를 잊지 않으려’ 몇몇 지명을 고쳤다. 그녀가 처음 배에서 내린 도두촌을 주포촌(主浦村)으로, 비단바지를 벗어 제사지낸 높은 언덕을 능현(綾峴·비단고개)으로, 붉은 기를 달고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깃발이 나타난 해변)으로 고쳐 허황후를 영원히 기념한 것이다.

그녀는 세상을 떠났지만 허황후 집단이 왕비를 독점적으로 배출하는 연합전선의 틀은 그대로 유지됐다. 허황후가 곰을 얻는 꿈을 꾸고 낳은 태자 거등(居登)은 2대 왕이 되자 허황후의 잉신 신보의 딸 모정(慕貞)을 왕비로 삼았다. 3대 마품왕의 왕비 역시 허황후의 잉신 조광의 손녀 호구(好仇)였으니 가야의 왕비는 허황후 집단에서 독점하는 것이 왕실의 관례가 되었던 것이다. 이때 신보의 직책은 천부경(泉府卿), 조광의 직책은 종정감(宗正監)이었는데, 이는 허황후 집단이 왕비족뿐만 아니라 가야 조정의 실권까지 장악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6대 좌지왕이 관례를 깨고 다른 가문의 여성을 왕비로 삼으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407년에 즉위한 좌지왕이 용녀(傭女)를 왕비로 삼고 그녀의 친정 세력을 등용하자 허황후 집단이 이에 강력히 반발했다. 신라가 이 틈을 이용해 침략하려 하는 등 국가가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 점쟁이는 ‘소인을 없애면 군자가 와서 도울 것’ 이라는 해괘(解卦)를 내놓았는데 ‘소인’ 은 물론 용녀였다. 결국 좌지왕은 용녀를 하산도(荷山島)로 귀양보내고 허황후 집단에게 사과해 연합전선을 복원함으로써 국가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허황후 집단은 용녀 집단의 도전을 물리치고 다시 가야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조선시대 문적인 ‘금관고사급허성제문집’ (金官古事及許性齊文集)은 허황후가 일곱 아들을 낳았는데 ‘장자 거등은 태자에 봉해졌고, 차자는 어머니의 성을 따라 허씨가 됐다’ 고 전한다. 어머니의 성을 따른 성씨는 김해 허씨와 여기서 갈라진 양천 허씨, 태인 허씨, 인천 이씨 등이다. 이들은 아직도 수로왕이 시조인 김해 김씨와 통혼하지 않는다. 장남은 수로왕을 따라 김해 김씨가 되고, 차남은 자신을 따라 김해 허씨가 되게 했던 것이니, 이들은 현대판 평등부부의 선구자인 셈이다.

▲ 경남 김해시 구산동 ‘수로왕비릉 ’
  아유타國

아유타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많은 논란이 있다. 인도 갠지즈 강 중류의 아요디아국이라는 설과 태국 메남 강가의 고도(古都) 아유티아라는 설이 있었다. 이는 허황후가 왔다는 아유타국과 발음이 비슷한데서 착안한 것인데, 김수로왕릉 정문 현판의 쌍어문(雙魚文)이 아요디아 왕국의 문장이라는 점도 주요한 증거로 인용되었다.

허황후의 시호가 보주태후(普州太后)라는 점에 착안해 중국 사천성(四川省) 가릉강(嘉陵江) 유역의 보주라는 설도 있다. 한국전통문화학교의 김병모 총장은 허황후 일행이 인도의 아요디아 국에서 난을 피해 중국 사천성의 보주 일대에 머무르다가 가락국으로 이주했다고 주장했고, 최근에 이희근 박사는 왜(倭)가 한반도 서남부에 있었다는 전제 아래 허황옥이 왜국 출신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덕일·역사평론가 2002.06.19)

수로왕이 딸 하나와 아들 아홉을 두었고, 허황후의 청으로 두째가 허씨 성을
따르고 나머지 7형제가 스님인 허황후의 오빠의 영향으로 스님이되었으며,
그 칠불을 기리기 위해 지리산 보현봉 밑에 칠불암을 지은 것.(공준수제공)


         다시 읽는 여인열전 13          


  사대부들의 ‘公敵’ 정난정

      ‘서출 멍에’ 거부하다, ‘악녀’ 낙인 찍혀. 문정왕후
      (文定王后) - 불교중흥 도와 … 독살누명 쓰고 자결




정난정의 아버지 정윤겸(鄭允謙)은 부총관을 역임한 양반이었지만 어머니는
군영에 소속된 관비(官婢)였다. 조선은 양반수의 증가를 막기 위해 신분이 다른 두 남녀 사이에서 난 자식은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는 종모법(從母法)을 실시했는데, 난정은 이 법에 따라 출생과 동시에 천인(賤人)이 되었다.

정난정은 의무만 있고 권리는 없으며 심지어 물건처럼 매매되는 신세를 저주했다. 결혼해서 자식을 낳으면 자신을 따라 천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 그녀를 더욱 절망케 했다. 중국은 서얼을 그다지 차별하지 않는다는데 왜 조선만 유독 적서(嫡庶)를 구별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것은 현실이었다. 조선은 오직 양반 적자(嫡子)만을 위한 나라였다.

난정은 양반 적자 출신인 윤원형이 이런 의식이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좋아했다.
윤원형은 조선 사대부들이 경멸해 마지않는 불교를 신봉했다. ‘명종실록’ 은
윤원형이 ‘중에게 시주하고 부처에 비는가 하면 산에 제사를 지내고 불경을 외는 등 하지 않는 짓이 없었다’ 고 비난하고 있는데, 그의 이런 불교 신봉은 독실한
불교도인 누이 문정왕후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문정왕후는 어린 명종을 대신해 수렴청정하게 되자 조선의 국시를 불교로 바꾸기로 결심했다. 문정왕후의 불교 중흥책을 앞장서 수행한 남성이 승려 보우(普雨)라면 여성은 난정이었다. 난정과 문정왕후, 윤원형과 보우는 불교를 매개로 신분을 뛰어넘는 동지가 되었다. 문정왕후와 보우가 폐지되었던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을 부활하고 승려들의 도첩제를 부활시키는 등 제도적인 측면에서 불교를 국시로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면 난정은 불사중창이나 불교행사 등 생활적인 측면에서
불교를 중흥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연려실기술’ 에는 난정이 해마다 두세 차례씩 쌀 두어 섬의 밥을 지어 두모포(豆毛浦)에 가서 물고기에게 던져 준 사실을 전하고 있다.

난정의 깊은 불심은 대비 문정왕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문정왕후는 명종 4년(1549) 윤원형의 공이 크다는 이유로 그 첩의 소생은 다른 집 적자와 통혼할 수 있게 했다. 물론 그 첩은 난정이었다. 뿐만 아니라 벼슬길에 오를 수 있도록 허용했다. 난정은 윤원형이 전 현감 김안수(金安遂)의 딸인 부인 김씨를 내쫓는 것을 굳이 막지 않았다. 윤원형은 난정을 부인으로 삼았으나 이는 조선의 국법이 허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을 거두기 넉 달 전인 명종 8년(1553) 3월 임금을 시켜 ‘윤원형의 첩에게 직첩(職牒)을 주도록 하라’ 는 명령을 내리게 함으로써 난정은 합법적인 부인이 되었다. 당시 윤원형은 종1품 의정부 좌찬성이었으므로 그녀도 단숨에 외명부 종1품 정경부인(貞敬夫人)이 된 것이다.

그녀의 자식들도 자연히 서출(庶出)의 굴레에서 벗어나 어엿한 적출(嫡出)이 되었다. 그러나 난정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자신과 자신의 자녀만 서출이란 굴레에서 벗어났다고 다른 서출들의 아픔을 외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세상을 저주하던 서출의 설움을 잊지 않았다. 명종 8년 10월 좌찬성 윤원형이 영의정 심연원, 좌의정 상진, 우의정 윤개 등과 함께 서얼허통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린 것은 난정의 강한 영향력이 작용한 것이었다.

“인재의 우열은 타고난 기질의 순수함과 그렇지 않음에 좌우되는 것이지 출생의 귀천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만일 재질이 뛰어난 사람이 첩의 몸에서 났는데, 서얼이라고 해서 등용하지 않는다면 어찌 왕자(王者)가 인재를 취함에 귀천을 가리지 않는 도라고 하겠습니까.”

서얼들도 과거를 볼 수 있게 하자는 과감한 주장이었는데, 이에 대해 이조 판서
안현(安玹) 등은 반대했다. 그러나 윤원형은 다른 벼슬아치들과 합세해 끝내 서얼허통법을 통과시켰다.

▲ 인기사극 ‘여인천하 ’의
정난정 역 강수연과 윤원형 역 이덕화.
난정은 천인들과 서출들이 주인들과 적출(嫡出)들에게 당하는 억울함을 충분히 체험했다. 전국 각지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 노비들이 그들 부부에게 몰려들었다. ‘명종실록’의 ‘(주인에게) 죄를 지은 노복(奴僕)들이 서로 이끌고 모여들어 그 수가 대단히 많다’는 기록은 이런 상황에 대한 설명이다. 명종 18년 윤원형이 영의정이 되면서 난정도 외명부의 수장이 되었다. 관비(官婢) 소생의 천출 난정이 드디어 조선의 모든 벼슬아치 부인들의 우두머리가 된 것이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부처님의 공덕으로 믿고 더욱 열심히 불교를
전파했다. 성리학으로 무장한 조선의 사대부들은 난정을 저주하면서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명종 20년 4월 6일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상황은 급변했다. 명종은
이양(李樑)을 중용해 윤원형을 견제했을 정도로 외삼촌 윤원형을 싫어했다. 명종은 대비 사망 후 경연에서 한나라 문제(文帝)가 외삼촌 박소(薄昭)를 죽인 사례를 언급했는데, 이는 윤원형을 공격하라는 신호였다. 명종 20년 8월 3일 대사헌 이탁(李鐸)과 대사간 박순(朴淳)이 윤원형을 탄핵하는 첫 포문을 열었다. 이들이 윤원형을 공격한 첫 번째 사유가 ‘관비(官婢)의 소생을 올려서 부인으로 삼은 것’이었던 점은 난정에 대한 사대부의 반감의 크기를 잘 보여준다.

그녀는 한달 후에 다시 첩으로 강등되었고 시골로 쫓겨난 윤원형을 따라갔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명종 20년 9월 윤원형의 전부인 김씨의 계모
강씨가 난정이 김씨를 독살했다고 고소했다. 난정이 전부인 김씨의 몸종 구슬이를 시켜 음식 속에 독약을 넣어 독살했다는 주장이었다. 고소장을 접수한 형조에서는 강상(綱常)에 관계되는 일이라서 자신들이 처리할 수 없다며 역모 등 체제사건을 다루는 의금부로 이첩했다. 의금부는 구슬이는 물론 10여 명의 여성들을 소환해 문초했는데 짜맞춘 구도대로 진술하기를 거부하는 여성들은 심한 고문을 당했다. ‘명종실록’ 10월 22일자의 ‘전일 형문한 사람은 모두 죽고 단지 주거리(注巨里·정난정의 여종)만 남았다’ 는 위관의 보고는 이런 사정을 잘 말해준다. 이는 그녀들이 심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혐의를 부인했다는 뜻에 다름 아니었다.

관련자들이 모두 죽자 의금부는 난정을 잡아다 심문하자고 청했다. 의금부가
원하는 것은 사건의 진상이 아니라 난정의 목숨이었다. 명종은 어머니의 무덤에
풀이 돋기도 전에 어머니의 동기를 내쫓고 어머니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마저 장하(杖下)의 귀신으로 만들기는 너무 빠르다는 생각에서 일단 거부했다. 난정은 자신의 부인첩을 거두라는 주장을 한 달 동안 거부하는 체 하다가 윤허한 것처럼 이번에도 종국에는 허락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번에 끌려가면 장하(杖下)의 귀신이 되리라고 직감한 그녀는 사대부들의 조롱 속에서 신음하지는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그녀는 명종 20년(1565) 11월 3일
‘금부도사가 온다’ 는 종의 말을 듣고 ‘남에게 제재를 받느니 스스로 죽음만 못하다’ 며 자결했다. 난정이 죽자 그녀를 가슴 깊이 사랑했던 윤원형도 뒤를 따라 음독자살했다. 그녀는 죽은 후 다시 천인으로 환원되었고, 사대부들은 그녀를 성리학과 강상(綱常)을 어지럽힌 만고의 죄인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을사사화의 배후 - “나쁜 것은 난정 탓” 윤원형의 떠넘기기

조선에서는 악정(惡政)의 배후에 항상 악녀(惡女)가 있는 것으로 그렸다.
연산군에게 장녹수가 있고, 광해군에게 개시가 있는 것이 그런 예이다. 명종이
즉위한 1545년 윤원형이 주도한 ‘을사사화’(乙巳士禍)의 배후에 난정이 있었던
것처럼 전하는 것도 이런 유형이다. ‘을사사화’는 왕실 외척인 윤임과 윤원형간의 대립에서 비롯된 사건으로 윤원형이 윤임 일파를 역모죄로 무고함으로써 사림 등 반대파를 숙청한 사건이다.

하지만 ‘윤원형 삭탈 명령서’를 살펴보면, 난정이 대비의 와병 때 문병한 것을 비난하는 대목은 있어도 을사사화 관련 내용은 없다. 또한 을사사화 희생자들을 신원(伸寃)하는 명령서에도 그녀가 이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내용은 없다. 이는 윤원형이 나쁜 것은 난정 때문이란 등식을 만들어 악정의 배후에는 악녀가 있다는 전형
으로 삼으려는 의도였다.

  문정왕후 文定王后 [1501~1565]


본관 파평(坡平). 윤지임(尹之任)의 딸, 명종의 어머니. 1517년(중종12) 왕비에 책봉되었음(중종의 繼妃). 1545년 명종이 즉위하자 모후(母后)로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이때 남동생 윤원형(尹元衡)이 권력을 쥐게 되자, 대윤
(大尹)이라고 하는 윤임(尹任) 일파를 몰아내는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중 보우(普雨)를 우대하여 숭유배불(崇儒排佛)을 무시하고 불교중흥을 도모하였다.

보우가 주지(住持)로 있는 봉은사(奉恩寺) 근처로 중종의 능을 이장(移葬)시켰다. 1553년(명종 8) 명종에게 친정(親政)을 하도록 하였으나, 이것은 형식적인 절차였을 뿐이고, 실제로는 윤원형과 협력하여 정사에 계속 관여하였다. 소생으로는 명종 이외에 의혜(懿惠)·효순(孝順)·경순(敬順)·인순(仁順) 공주 등 1남 4녀를 두었다. 능은 서울 노원구 공릉동(孔陵洞)의 태릉(泰陵)이다.


(이덕일·역사평론가. 2002.06.26 )


         다시 읽는 여인열전 14          


  성인 되려한 성리학자 임윤지당(任允摯堂)

        "네가 대장부였다면…" 규중에 갇힌 '君子'




임윤지당(任允摯堂 · 1721~1793)의 동생 임정주(任靖周)가 쓴 「윤지당유고」
유사(遺事)에 따르면, 그녀는 어린 시절 오빠나 동생들이 경서나 사서 등을 공부
하고 정사를 논의할 때 어려운 질문을 던져 “네가 대장부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라는 탄식을 받았다. 남달리 영리했던 그녀는 정치나 역사같은 부분들이 여성에게 금단의 영역임을 잘 알고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7~8세 때 외가에서 몇 달을 보낼 때 어른들이 잠자리에 든 후에야 비로소 잠옷으로 갈아입었으며, 어른들보다 먼저 일어나 침구를 거두고 단장한 후 평상복을 갈아입었다는 일화는 이를 잘 말해준다.

그녀의 고조부 임의백(任義伯)은 김장생의 문인이자 노론 영수 송시열의 동문이었으므로 학통으로는 최대 명문가였다. 그러나 그녀의 증조부와 조부, 부친은 모두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다. 그녀의 부친 임적(任適:1685~1728)은 송시열의 수제자 권상하(權尙夏)의 제자였으나 모친은 소론 영수 윤증(尹拯)의 6촌 동생 윤부(尹扶)의 딸이었으므로 노 · 소론의 피가 함께 흐르고 있었다. 과거에 실패한 부친은 음직으로 양성현감이 되었다가 영조 1년 종5품 함흥판관으로 승진했으나 기생을 매질한 사건이 문제가 되자 관직을 버리고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 송현방의 셋집에
살던 임적은 이듬해 집과 전답을 마련해 둔 청주의 산골마을 옥화로 이사하려다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 그녀의 나이 여덟 살 때였다.

그녀에게 아버지 역할을 대신한 인물은 둘째 오빠 임성주(任聖周)였다.
그는 훗날 조선의 10대 성리학자에 들 정도의 뛰어난 학자가 되는데, 그녀에게
여성의 금기사항이었던 학문을 가르쳐 주었을 뿐만 아니라 윤지당(允摯堂)이라는 호도 지어주었던 것이다. 윤지당은 동양의 이상적인 여성상인 중국 고대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과 문왕의 부인 태사(太 )의 친정을 뜻하는데 주희(朱熹)의 윤신지(允莘摯)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열아홉 살 때 한 살 아래인 원주 선비 신광유(申光裕)에게 시집가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그녀는 사당에 처음 배알할 때 하녀의 시중을 물리치고 손수 제기를 받들어 모시는 등 모든 행위가 ‘법도에 맞아’ 시댁 어른들에게 큰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의 결혼생활은 8년만인 영조 23년(1747년) 신광유가 27세의 젊은 나이로 죽음에 따라 희망을 상실했다. 설상가상으로 난산 끝에 낳은 아이마저 태어난 지 얼마 안돼 죽어버린 상황이라 자식 없는 청상과부가 된 것이다. 남편이나 자식의 벼슬에 따라 받을 수 있는 외명부의 직첩도 받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남편도 자식도 없는 집에서 그녀는 와병 중인 시어머니뿐만 아니라 죽은 남편이
후사가 없는 백부 신계(申啓)에게 입양된 관계로 양 시어머니까지 모시고 시집
살이를 해야 했다. 그녀는 남편 대신 시동생과 의논해 가사를 처리했는데, 시동생 신광우(申光祐)가 지방에서 벼슬살 때면 그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 의견을 물었다. 이때 그녀의 편지는 모두 언문(한글)편지였는데, 일부러 아녀자의 글로 쓴 것이었다.

그녀는 38세 때 큰오빠 임명주(任命周)가 죽자 쓴 ‘오빠 정언공에게 올리는 제문’(祭伯氏正言公文)으로 감추었던 한문 실력이 드러난다. 이 글에서 “사람들은 곧잘 ‘감정이 북받치면 글이 되지 않는다’ 고 말하는데 이는 글로써 그 감정을 표현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하물며 이 여동생은 문장이 졸렬하고 마음 또한 황폐하니, 비통한 마음의 만분의 일이라도 서술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겸양했으나 이 제문은 사대부들을 놀라게 했다.

45세, 47세 때 각각 두 시어머니가 모두 죽어 시가의 웃어른이 되었으나 일상생활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늦은 밤 시간을 학문에 투자했다. 신광우의 ‘윤지당유고’ 발문은 이런 상황을 말해준다. “우리 가문에 시집오셔서 서적을
가까이하는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고, 일상 대화 속에서도 문장에 관해 말하는 일 없이 오직 부인의 일에만 힘쓸 뿐이었다. 그러나 시부모가 다 돌아가시고 연로했을 때 간혹 집안 일 하시다가 여가가 나면, 밤이 깊은 후에 보자기에 싸 두었던 경전을 낮은 목소리로 읽으셨다…이후에야 우리들은 형수의 학문이 남모르는 공부의 결과임을 알았다.”

그녀가 65세 때 자신의 문집 초고를 베껴 동생에게 보내는 글에서 ‘나는 어려서부터 성리의 학문이 있음을 알았다. 조금 자라서는 고기 맛이 입을 즐겁게 하듯 학문을 좋아하게 되어 그만두려 해도 할 수 없었다’ 라고 쓴 것처럼 타고난 성리학자였다. 그러나 성리학은 남성들을 중심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남성들의 학문이었다.
그녀는 인간의 본성이나 지적 능력, 도덕적 실천에 있어서 남녀의 차이가 있다고 보지는 않았으나 남성 우위의 현실과 싸우는 대신 타협하는 방식을 택했다.

“남자는 씩씩하고 여자는 유순한 것은 각기 그 법칙이 있는 것이다. 성인 태사(聖 )와 성인 문왕(聖文)의 업적이 서로 달랐던 것은 그 분수가 달랐기 때문이다…서로 처지가 바뀌었더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런즉 부인으로서 태임과 태사처럼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자포자기한 사람이다.”

비록 여자는 아무리 해도 문왕의 반려자인 태사밖에 되지 못하는 종속변수지만
이글에서 그녀가 ‘성인 태사(聖 )와 성인 문왕(聖文)’ 이라고 둘을 대등하게 표현하면서 태사를 앞세운 것은 주목할 만한 시각이다. 그녀는 남녀 사이의 차별을 뛰어넘는 인간 최종의 목표, 즉 성인을 지향함으로써 남녀차별적인 성리학의 남녀관을 극복하려 했다. ‘이기심성설’ (理氣心性說)에서 임윤지당은 ‘순수하게 선하고 악이 없는 것이 본연의 성품인데, 이는 하나의 원리에 근원을 둔 것으로서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부여받은 것’ 이라고 했는데, ‘모든 사람’ 의 범주에는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도 들어가는 것으로서 이 본연의 성품을 순수하게 체현하는 것이 ‘성인’ 의 길이었다.

그녀는 만년에 자기 학설을 글로 남기기 시작했는데, 「대학」과 「중용」에 대한 해설인 「경의」(經義)나 「이기심성설」(理氣心性說),「인심도심사단칠정설」
(人心道心四端七情說), 「극기복례위인설」(克己復禮爲仁說)처럼 모두 성리학의 근본 이론에 관한 논문이었다. 동생 임정주의 “아, 누님같은 사람은 진실로 규중(閨中)의 도학(道學)이요, 여인들 중의 군자(君子)라고 할 만하다” 라는 평가처럼 그녀가 희망 없는 현실의 탈출구로 매달렸던 학문은, 당대 최고 수준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녀의 이런 경지는 날이 더워 부채질한다는 조카들에게 “정신을 집중해 책을 읽으면 가슴 속에서 자연히 서늘한 기운이 생기는 데 어찌 부채질할 필요가 있겠는가?” 라고 말할 정도의 집중력과「극기복례위인설」에서 쓴 대로 ‘진실로 남이 한 번 노력하면 나는 천번 노력한다는 정신으로 노력’ 한 결과였다.

발군의 노력으로 조선 초유의 여성성리학자가 된 그녀는 정조 17년(1793)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문집이 발간되면서 ‘지금 세상을 떠났는데 그 명성이 더욱 높으니, 군자의 덕은 어두운데서도 날로 드러난다고 한 말이 과연 틀리지 않는다’ 는 발문처럼, 학문으로 다시 살아났다.

  윤지당유고 남편 원수 죽인것을 ‘孝의 표상’ 칭찬

▲ 임윤지당이 남긴 문집 ‘윤지당유고 ’
「윤지당유고」에는 여러 인물에 대한 평가가 들어있다. 경상도 삼가현의 최씨·홍씨 모녀가 남편과 부친의 원수를 살해한 것을 열녀 · 효녀의 표상으로 극도로 칭찬한 그녀는 사마광(司馬光)이 「자치통감」(資治通鑒)에서 유비의 촉한 대신 조조의 북위를 정통으로 인정한 것은 극도로 비판했다. 또 중국 북송 때의
개혁 정치가 왕안석(王安石)에 대해서‘정치의 근본을 소홀히 하고 지엽에만 치중하여, 재화의 이득만을 생각하고 부국강병만을 꾀했다’ 고 비판했다. 이는 조선 유학자들의 보수적인 역사인식의 반영이자 사대부 남성들의 시각에서 세계를 바라 본 그녀의 한계이기도 했다.

- 이덕일·역사평론가.2002.7.9

◆ 다음편은 ‘淫女로 몰린 聖君’진성여왕입니다.

         다시 읽는 여인열전 15          


  ‘淫女로 몰린 聖君’ 진성여왕

       “국정혼란은 내탓”…왕위 넘겨 책임정치 실현
        여왕 간통설 근거없어…즉위하자 조세 면제



신라가 진성여왕(재위 887~897) 때문에 망했다는 통설은 과연 맞는 것일까. 진성여왕은 신라의 51대왕으로 56대 경순왕까지
다섯 명의 후대 임금들이 더 있다. 그럼에도 신라는 진성여왕 때문에 망했다는 견해가
지배적인데, 이런 시각의 원조는 김부식의 ‘삼국사기’ 진성왕 조(條)이다.

“진성왕이 전부터 각간 위홍(魏弘)과 통하였는데〔通〕, 때에 이르러 항상 궁중에 들어와 일을 보게 하였다… 홍이 죽자 혜성대왕(惠成大王)이란 시호를 추증했다. 이때부터 2~3명의 미소년을 가만히 불러들여 음란한 짓을 자행하고 그들에게 요직을 주어 국정을 위임하니 이로 말미암아 임금의 총애를 받는 자들이 방자하게 날뛰고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졌으며, 상벌이 공정치 못하여 기강이 문란해졌다….”

일연의 ‘삼국유사’ 도 이런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제51대 진성여왕이 임금이 된 지 몇 해 만에 유모(乳母) 부호부인(鳧好夫人)과
그의 남편 위홍 등 3,4 명의 총신(寵臣)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사용해 정사를 어지럽히자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근래에 발견된 황룡사 탑지에서 황룡사 9층목탑의 중수책임자였던 위홍이 진성
여왕의 아버지 경문왕의 동생이라는 내용이 나오자 그녀는 ‘역시’ 음녀였다며 그녀 때문에 신라가 망했다는 시각이 맞음을 재차 확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성여왕과 위홍의 관계는 신라 당대인들의 시각에서는 불륜이나 추행이 아니었다. ‘위홍이
죽자 혜성대왕(惠成大王)이란 시호를 추증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이나 ‘삼국유사’ 「왕력(王曆)」조의 “왕의 배필은 위홍 대각간(大角干)이다” 라는 기록은 둘 사이가 공인된 관계였음을 말해준다. 둘이 신라 사회의 성 윤리를 어기고 간통한 사이였다면 죽은 위홍을 ‘대왕’으로 추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오빠 정강왕의 유조(遺詔:임금의 유언)도 음녀와는 거리가 멀다. “나는 불행히 사자(嗣子)가 없으나 누이동생 만(曼:진성여왕)은 천성이 명민하고 골상(骨相)이 장부와 같으니 경 등은 선덕·진덕여왕의 고사에 의거해 그를 왕위에 세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정강왕이 진성여왕을 후사로 삼은 것은 위기타개를 위한 일종의 승부수였다.
선덕 · 진덕여왕이 위기의 신라를 구해내고 신라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것과 같은 역할을 진성여왕에게서 기대했던 것이다. 진성여왕 즉위 당시 신라는 붕괴의 길을 걷고 있었다. 진골 귀족 사이에 반란이 잇달았다. 진성여왕 때부터 역순으로 잠시 살펴보면 50대 정강왕 2년(887)에 이찬 김요가 반란을 일으켰으며, 49대 헌강왕 5년(879)에 일길찬 신홍(信弘)이, 48대 경문왕 14년(874)에 이찬 근종(近宗), 6년(866)에 이찬 윤흥(允興)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불과 20년 사이에 4번의 반란이 일어났으니 연례행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강왕은 여왕을 세워 위기를 극복하려 한 것이었다.

진성여왕은 정강왕의 믿음에 보답하듯 즉위하자마자 죄수를 대사(大赦)하고
모든 주군(州郡)의 조세를 1년간 면제했다. 그녀는 백성들의 고통을 가슴 아파하는 애민군주였던 것이다. 그러나 진성여왕에게는 자신의 구상을 집행할 인재들이 없었다. 선덕·진덕을 보필했던 김춘추와 김유신같은 인재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재위 3년(889) 상주 지방에서 원종과 애노가 주도하는 난이 일어나자 진성여왕이 진압하라고 보낸 내마(柰麻) 영기(令奇)가 성을 장악한 반군이 두려워 가까이 가지 못할 정도였다. 이 반란의 계기가 ‘국내 여러 주군에서 납세를 하지 않아 창고가
비고 국가재정이 결핍되어 국왕이 사신을 파견해 납세를 독촉한 것’ 때문이라는 ‘삼국사기’ 기록은 이 무렵 신라의 국가시스템이 붕괴했음을 말해준다.

위홍은 그녀의 일급 참모였지만 이런 위기상황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황룡사 9층목탑을 중수하고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향가집 ‘삼대목’(三代目)을 편찬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문화의 인물이지 위기관리 인물은 아니었고 또 일찍 사망했다. ‘삼대목’ 편찬 등은 진성여왕과 위홍의 신라전통문화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당시 신라사회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비상수단을 통한 안정이었다.

재위 5년 양길(梁吉)의 부장 궁예(弓裔)가 강릉지역을 공격하고, 재위 6년에는
견훤(甄萱:진훤)이 완산(完山:전주)에서 후백제를 세우는 등 혼란이 가중됐다.
이런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그녀가 던진 승부수가 최치원이었다. ‘토황소격문’
(討黃巢檄文)으로 당나라에 문명을 떨친 최치원은 헌강왕 11년(885년) 17년간의 체당(滯唐)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다. 그는 세계제국 당나라에서 익힌 정치철학과 행정능력을 신라에서 발휘하고 싶었으나 진골이 아니면 고위직에 오를 수 없는 폐쇄적인 신라에서 중하위 지방관을 전전하는데 그치고 있었다.

그런 최치원에게 진성여왕은 재위 8년(894) 난국타개책을 작성해 올리라고 명령했다. 최치원은 이에 따라 시무 11조를 올렸는데 여기에는 당연히 신분보다는 능력에 따른 인재등용을 요구하는 내용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진성여왕은 이를 즉시 가납하고 최치원을 6두품 중의 최고 관직인 제6관위 아찬에 봉했다.

그러나 ‘삼국사기’ 「최치원」 조에서 “최치원은 중국 유학에서 배운 것이 많다고 생각해서 본국에 돌아와 자신의 뜻을 실현하려고 하였으나 말세에 그를 의심하고 꺼리는 자가 많아서 그의 뜻이 허용되지 못하고…” 라고 기록하고 있듯이 그의 시무책은 진골귀족들에 의해 거부되고 말았다. 이는 신라 개혁안의 좌절을 의미했다. 그 결과 재위 10년에는 빨간 바지를 입은 도적인 적고적(赤袴賊)이 지방은 물론
서라벌의 모량리까지 약탈하는 등 통제불능의 상황에 빠져들었다.

진성여왕은 이런 사태에 책임지고 왕위에서 물러나기로 결심했다. 재위 11년(897) 6월 “근년 이래 백성들이 곤궁해지고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니 이는
나의 부덕(不德) 때문이다” 라며 큰오빠 헌강왕의 서자 (효공왕)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36대 혜공왕 이래 국왕이 피살되거나 자결하는 등 신라 하대의 혼란은
오래되었어도 스스로 책임을 통감하고 양위한 임금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왕위를 내놓고 북궁(北宮)에서 거주하다가 6개월도 안된 그해 12월 세상을 떠난 데서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결단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책임정치 실현은 후대에 신라 망국의 책임에 대한 자인(自認)으로 악용됐다.

그러나 진성여왕 당대에 세워진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문」에서 최치원은 “(진성여왕의) 은혜가 바다같이 넘쳤다” 고 적어 그녀를 성군으로 묘사했다.
당대의 성군과 후대의 음녀 중 여성에 대한 편견을 제거하면 진실은 자명하다.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최치원이 진성여왕 극찬

▲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충남 보령시 성주면(聖住面)에 있는 통일신라 말의 고승 무염(無染·801~888)의 탑비로서 신라 것 중 가장 큰 비석이다(높이 4.55m).
국보 8호로 지정됐다. 낭혜는 진성여왕이 내린 시호이고 원법명은 무염인데 태종무열왕의 8세손으로 애장왕 2년(801) 태어났다. 당(唐)나라에 20여 년 체류했으며 귀국 후 성주사에 있다가 진성여왕 2년 입적(入寂)했다.

이 탑비는 거대한 외형이나 힘찬 조각과 글씨들이 신라 석비의 대표라고 할만하다. 최치원같은 비판적 지식인이 진성여왕을 극찬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특히 이 글은 진성여왕에 의해 최치원이 중용되기 이전에 쓴 글로,
후대 기록인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가 그녀를 극도로 폄하한 데 대한 당대의 반론이란 점에서 신뢰도가 높다.

-이덕일·역사평론가.2002.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