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9일 13시 10분 대가야 관광버스로 교정을 출발하여 15시 30분에 부산에 도착, 16시 15분에 날렵한 코비호에 몸을 싣고 일본으로 출발했다. 1943년 6월 어느 날 선고(先考)께서 24세의 나이로 무논에 써레질하다 징용 당하셔서 `45년 8월 해방되고도 2개월이 지나서야 천신만고 끝에 동료 유해를 가슴에 안고 돌아오셨던 한 많은 사연을 생각하면 2세로서 마음이 매우 덤덤하기도 했다.
부산항을 떠난 지 정확하게 2시간 55분이 지난 19시 10분에 규슈지방의 공업도시 하카다항에 도착했다. 처음 보게되는 석양에 비친 일본 땅! 듣던 바와 같이 깔끔했다. 그렇게 높은 빌딩이나 아파트가 많지 않고, 낮은 건물이 대부분이었다. 곳곳에 숲이 잘 가꾸어져 있고, 공장 굴뚝도 연기가 거의 올라가지 않는 것으로 보아 환경면에서는 우리보다 앞서 나가는 것 같은 첫 인상이었다.
우리를 태우고 본격적으로 일본 여행을 할 운전기사가 친절하게 허리를 연신 굽히면서 하이!를 연발하는 모습이 재미있기도 하면서 진짜 일본임을 실감나게 해 주었다. 우리를 안내하게 된 가이드는 교포 2세인 안묘선 양으로 아주 예쁘고 상냥하게 생긴 아가씨였다. 우리 말은 물론 일본 말이 아주 능통하였다. 할아버지께서 우리 말·글·역사·생활습관 등을 2세들에게 철저히 교육하셨다고 했다. 과연 그 진가를 알 수 있었고 교육자인 우리들을 참 흐뭇하게 해 주었다.
버스로 교포가 운영한다는 식당에 가서 저녁을 맛있게 먹고, 숙소인 이나사야마 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저녁에 일본 거리를 구경할 요량으로 여기 저기를 돌아다녀 보았다. 그런데 역시 일본은 요즘 듣던 바대로 불경기란 소문이 확실히 피부에 와 닿는 듯 했다. 도시에 따라 다른 점은 있겠으나 거리는 우리에 비해 무척 어두웠으나 우리같이 흥청거리는 모습은 거의 없었다. 8시 정도에 많은 상점 문이 내려졌으며 일반 가정에도 불빛이 새어나오는 경우는 적었다. 이 호텔 안에서도 음식은 먹을 만큼만 나오고, 세면대에 나오는 물은 아주 적절한 양으로 조절되어 있고, 방안의 불도 필요한 부분에만 켤 수 있도록 배려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작은 것에서도 절제와 절약의 미덕을 보는 듯 했다. 식당, 목욕탕에서도 크게 떠들지 않는다는 사실, 남을 배려하는 마음들, 나아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생각을 보고 배울 수 있었다.
이튿 날, 아침 식사 후 나가사키에 있는 평화공원과 원폭자료관을 관람하였다. 1945년 8월 6일 08시 15분에 히로시마에 첫 번째 원폭이 투하되었고, 이어 9일 11시 02분에 다시 투하되었다. 이때 나가사키 인구가 24만 명이었다는데, 이로 인한 사망자가 7만 3천 884명, 부상자가 7만 4천 909명이라하니 인구의 60% 이상이 원폭에 신체적 피해를 입은 셈이다. '평화 공원'에 담긴 염원,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함'을 여기에 와 본 모든 사람들은 다짐하고 반성하여 실천했으면 얼마나 좋겠나! 또 눈뜨고 차마 보고 싶지 않는 처참한 흔적!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래서는 안 된다는 반성과 회한의 안타까운 마음을 다 가지게 될진 대, 왜 전쟁은 자꾸 일어나는가? 여기서 또 한번 되새겨 볼 일! 일본은 임진왜란과 한일합방 그리고 대동아 전쟁을 '왜 일으켰는가?' 를 후손들도 반성하고 후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참상! 그리고 그 희생! 무엇으로 위로가 되겠는,가마는 인과 응보의 부처님 말씀 한번 더 되새겨 이 땅 이 지구상에 전쟁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 사치스런 얘기가 아니길.......
여기 원폭자료관을 들어오다 힘없이 전해주는 가이드의 "조선인 피해 추모비가 초라하지만 있다."는 말에 귀와 눈이 쟁쟁 번쩍였다. 눈을 깜박이며 '찾아보시래!' "좋다"고 하면서 찾기 시작, 한참 후 정말 어안이 벙벙하고 답답하였다. 어느 모퉁이에서 태극기를 발견하고 달려가 찡한 가슴 안고 동료 장진욱 선생님과 함께 추모비 앞에 섰다. 약 1분간 묵념을 한 뒤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서 주위를 둘러본즉 아니나 다를까! 앞은 인형 같은 동상으로 가려져 있고, 옆은 5M 거리에 화장실이 위치해 있었다. 더하여 안내표지판은 울화통을 터뜨리기에 충분했다. 이 추모비는 일본 정부나, 나가사키현 관청이나 대한 민국 정부가 세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가사키 원폭투하 시 조선인들은 살기가 힘들어 일본으로 건너와 노무자로 많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피해자가 약 2만 정도 되었고, 그 분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나가사키에 살고 있는 조선인의 인권을 지켜주려는 일부 양심적인 사람들이 모인 시민단체가 돈을 모아 여기 추도비를 세웠다"고 써 놓았다. 옆에 깔끔하게 조성된 공원과 한쪽 모퉁이에 서럽게 앉아있는 추모비가 비교되어 서러움의 분을 한동안 삭이지도 못했으며, 또 애써 감추려는 듯한 가이드의 자신감 적은 눈깜박임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 답답한지고 일본 사람들아! 너희는 남에게 피해 안 주려는 생활신조가 있다고 보았는데, 어떻게 여기에서까지 우리 한국과 한국인에겐 이렇게 인색하고 예의를 지키지 않는다 말인가? 그래서 당신들을 믿다가도 못 믿겠고, 못 믿다가도 이래서는 안 되는 데 싶어 다시 믿으려 하면 답답함이 우리 한국인들의 가슴에 다시!...... 조선인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나, 잘못했다는 사과는 역사적 진실을 말하는 것이고, 피해를 준 것에 대해선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 너희나 우리 선조들을 더 이상 욕보이지 않는 길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싶었다. 덧붙여 일본인들이 진솔하다는 평을 다시 듣는 계기와, 한국 사람들과 정답게 지내고 앞으로도 진정 가까운 이웃으로, 나아가 영원한 동반자로 살아가야 할 역사적 인식 전환의 계기가 되길 기원하고 싶었는데......
우리 일행들은 다시 들판과 산야를 달려 바닷가에 있는 미즈나시혼진 화산 피해 마을 보존지구로 갔다. 가는 도중 곳곳의 농촌 풍경은 한국이나 별 다름없는 한적하고 고즈넉한 시골 풍경 그대로였다. 멀리 가까이 보이는 산만이 인공적으로 조성한 울창한 숲들로 오늘날의 일본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일면이었다. 일본에는 4월 26일을 식목일로 정해 나무를 심고, 나아가 12월 23일은 숲기금 조성의 날로 정하여 관광지마다 이를 위한 캠페인을 벌이고 모금함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도 본받을 만한 일임에 충분했다.
가는 길에 자주 보이는 텅 빈 골프장도 최근 일본의 불경기를 말해주는 일면인 것 같았다. 이 곳에 최근 한국인들이 자주 들락거리며 골프를 즐기고 있다는 가이드의 얘기에서 뭔가 씁쓸한 감정을 지울 수 없었다.
이 화산 폭발 지역에서 1792년에 1000여명의 사상자를 냈고 1990년엔 44명의 부상자를 냈다고 했다. 이제는 휴화산으로 들어갔다는 판정을 내리고, 이 지역을 고스란히 보존하여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여기서 다시 대구 지하철 참사 현장 보존에 대한 안타까움이 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아픈 역사는 잊으려고 하거나 자취를 없애면 더 큰 화를 자초하고, 지나고 나면 후회만 하게되는 엄연한 역사적 진실 앞에 그들의 역사의식과 교육적인 안목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은 나 한 사람만의 생각이 아닌듯 싶었다.
점심 식사 후 13시 30분에 시마바라항으로 와서 페리오션을 타고 14시 40분에 쿠마모토섬에 도착했다. 쿠마모토섬은 숲과 물의 도시라고 불리는 곳이다. 물이 맑고 숲이 많아 말이 잘 자라고, 또 말고기 요리가 오늘날까지도 전통적 자랑거리란다. 물이 좋다면 술이 좋은 건 당연지사. 장수마을이란 말도 일리가 있었다. 이곳엔 일본의 유명한 장수와 무사가 아주 많이 배출된 곳이다. 임진왜란 당시 악명을 떨쳤던 카또기요마사(가등청정)가 여기 출신이고, 그들이 쌓은 성이 그 옛날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성 쌓는 기술은 우리 나라에서 배웠다고들 하나, 우리는 거의 크기가 같은 돌을 바로 쌓아 올리는데, 이들은 큰돌과 작은 돌들을 끼워서 만들고 거기다가 다양한 각도로 쌓아 올린 점이나 성안을 거의 미로형태로 만들었다는 사실이 특색이었다. 또한 카또가 임진왜란 당시 울산성에서 악전고투한 것을 교훈 삼아 성안에 우물을 많이 파고 식량대용으로 은행나무를 꼭 심었다는 사실은 이 성이 우리 나라와 어떤 형태로든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현재 잘 보존되어 있는 천수각과 우토성루를 관람하였다. 그 외 일본엔 수 백 개의 성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는 자랑거리를 듣고 나니 이 부분에서도 새로운 다짐과 반성의 마음이 다져지는 것 같았다. 저녁엔 구마모토 역에서 약 500M 지점에 위치한 뉴 스카이 호텔에 숙박을 했다.
여행 3일째, 빡빡한 일정! 볼 곳은 많고 시간이 적다는 사실이 아쉬움을 더하게 했다. 한 곳에라도 더 보고 많이 느끼겠다는 선생님들의 열성에 가이드도 신이 나서 8시 30분에 정확하게 출발했다. 오늘은 일본의 아소산(阿蘇山)으로 등반하기로 되어있다. 이 산은 우리의 대관령, 한라산, 제주도 등과 맞먹는 산이란다. 붉은 소가 있고 우리의 소가 있는 산, 30만년 전에도 활화산, 지금도 활화산, 그런데도 민박, 신사(神社), 골프장이 즐비하고, 주민이 수만명이나 살고 있단다. 겨울엔 눈이 자주 와서 구경하기가 참 힘드는 곳이란다. 1995년에도 7개 분화구가 폭발했으며 그 둘레가 4Km나 된다고 한다. 아소산 전체 둘레가 128km 우리 여의도의 45배란다. 이 지역의 온천수 온도는 98도C 라고 한다.(우리나라 온천 중에 수온이 제일 높은 곳=42도C-대전 유성)
9시 09분에 원숭이 공연장에 도착한 일행들은 잠시 동안 사람과 원숭이가 함께 벌이는 재롱에 일시적 피곤을 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자극과 반응의 원리를 최대한 활용하여 재롱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하였다고 볼 수 있었다. 특히 관중들의 박수에 대한 답례로 한참 엎드려 옆의 눈치 봐 가면서 인사하는 꼴은 우리의 배꼽을 한껏 빠지게 했다.
공연 관람 후 버스를 타고 아소산으로 올라갔다. 운무가 자욱한 아소산, 하늘을 향해 날개를 달고 나르는 듯했다. 흥에 겨운 가이드, 드디어 '그 대 손길'이란 노래가 흘러나오고, 일행들도 흥겨운 나머지 탄성과 박수가 자연적으로 차 안을 메웠다. 좀더 오르니 옆에 화산 규제 정보판이 보였다. 수시로 화산 폭발에 대한 위험 예고와 행동요령을 알린다는 것이다. 전공한 과학자들이 계속 정보를 캐고 분석해 관광객이나 관청에 보고한다는 것이다. 아소산 분화구가 뿜어내는 연기와 열기, 그리고 코를 찌르는 유황 냄새! 폭우가 내리는 것을 아랑곳 하지않고 한 곳도 빠뜨리지 않으려는 선생님들의 연수 자세가 가이드를 놀라게 했다. 13시에 차에 올라 분화구를 뒤로하면서 초원의 무한대를 달리기 시작했다. 화산에는 뱀이 없다는 가이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차는 미끄러져 내렸다. 사슴, 원숭이, 소도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고, 골프장도, 초원의 역도 통과하고, 민속촌 간판이 붙은 곳도 지났다. 40분 이상 초원을 달려왔는데도 다시 삼림지역으로 들어서는 것이 아닌가? 13시 48분에 조자바루의 경마장과 골프장을 지나고 한참을 달려 반개고원(飯開高原)에서 잠시 휴식하고 내달려 2시 41분에는 벳부(別府)라는 온천지구에 다달았다.
인구 13만의 도시 벳부, 찾아오는 사람은 그 100배가 된단다. 온천탕 9가지(가마솥지옥, 피지옥, 산지옥, 대머리, 금용, 백지, 간헐천 등)에다 한집 건너 온천, 온천 건너 또 온천 온천이 약 500개, 지하에서 피어오르는 유황꽃은 세계적 선전거리로 등장하고 있었다. 이 온천은 무좀, 땀띠, 신경통, 류머티즘, 냉증, 요통, 습진, 어깨결림 등에 효능이 있다고 했다. 온천을 다 둘러보지는 못하고 바다지옥이라 불리는 곳을 대표로 관광했다. 이 온천(우미지고꾸)은 1200년 전 쯔루미산 폭발에 의해 생긴 커다란 연못이 푸른 바다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다고 한다. 화씨 200도의 열탕에 하루 약 3600KL의 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과연 장관이었다. 그러나 생각을 좀 달리 해보면 '이 밑에 벌겋게 달아오른 용암못이 있다. 정말 불안한 지역이다'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이곳을 구경하고 스기노에 호텔로 향해 21일의 일정을 마무리지었다.
마지막 날 아침 6시에 기상, 온천욕과 산책, 식사 후 출발이 곧 8시 08분이었다. 여기서 약 2시간 정도 달리면 오늘의 목표지점인 다자이후 텐망궁에 도달하게 된단다. 달리는 길 양쪽에서 시선을 끄는 것이 바로 우리도 요즘 관심의 대상인 납골당이었다. 시내, 마을, 집 옆 곳곳에 납골당이 보였다. 일본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곧 신으로 변하는 것으로, 또 친한 사람이 죽으면 친한 신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유해를 아무리 가까운 곳에 둬도, 흔히 생각하는 괴이한 귀신같은 감정이 아니라 아주 친근감 있는 신이란 것이다. 그래서 동리 어귀에, 한 복판에, 집안에, 공원에, 빌딩 옆, 어디든지 납골당을 둘 수 있다는 생각들이었다.
출발한 지 약 1시간이 지나도 역시 숲 속의 도시와 전원적인 농촌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아파트도 역시 숲 속의 아파트였다. 중국의 미개발과 한국의 난개발을 보란 듯 미래지향적 지혜로운 개발로 아름다운 전원 풍경을 뽐내고 있었다. 이윽고 텐만궁에 도착하여 관람했는데, 여긴 일본이 학문적으로 자랑하는 인물 3성(三聖) 중에 쓰가와 미찌자네를 신으로 모신 일종의 사당이었다. 그를 모시는 상징으로 가꿔놓은 나무며, 만들어 놓은 조각 및 유물들은 가히 찾는 이로 하여금 우러러 볼 마음을 일깨우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우리도 존경스런 선조와 위인들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해야겠다는 마음을 다지며 궁을 빠져나와 이번 연수를 마감하려 했다.
처음부터 많이 배우자고 출발한 연수팀! 화이팅이었다. 정말 우리 선생님들은 진지했었다. 줄서는 모범을 보였고, 시간 지키는 데는 가이드도 놀라는 것 같았다. 책을 찾고 진지하게 토의하는 모습이 서울서 온 일행 여형제 전금자·영자 여사를 감동시키고 말았다.
'가깝고도 먼 나라' 혹은 '이웃'이라는 표현이 어쩌면 썩 잘 어울렸던 일본. 잘못하면 편향적 시각으로 일본을 볼 수도 있었지만 성심과 성의를 다하여 객관적으로 보고 판단하려 다짐하면서 출발했고 또 그렇게 노력했었다. 양국 관계가 잠잠해질라치면 꼭 긴장감을 일으키는 일본이라 나의 마음 추스리기에 참 힘이 들었다.
끝으로 4일 동안 정성과 열의를 다하여 가이드 역할을 잘해준 안묘선 양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일행 모두가 동감하는 바 드물게 만난 멋진 가이드였다. 이구동성(異口同聲)의 칭찬이 있었기에 더욱 흐뭇했다. 안 양도 "16년 가이드 생활 중에 가장 편안하고 즐겁고 가슴 뿌듯한 안내였다고 자부하고 싶다"면서 인사를 했다. 아리따운 아가씨 많이도 참는 듯 했는데 총각선생님들의 징긋한 한 두 마디 인사에 그만 눈시울을 붉히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말았다. 멀리 버스가 안 보일 때까지 정답게 손을 흔드는 모습이 연수 마감을 한층 정겹게 했다. 뒤돌아 보이는 그 모습이 대견스럽기도 하고 참 고맙기도 해 14명이 모운 웃음 보따리를 버스 뒤로 던져주고는 휑하니 대구로 향했다.
총괄했던 학년부장 서상언 선생님! 계획과 실천에 빈틈이 없었던 총무 최병권 선생님. 정말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참여한 모든 선생님들 참 의미롭고 추억에 오래 남겨질 연수였습니다. 안녕히.....
뒷줄왼쪽부터 홍원희선생님, 김대도, 고덕민, 장진욱, 박덕용, 최병권, 장진환, 앞줄 오른쪽 부터 구자용, 이경진 ? 조정식, 서상언 필자-이구동, 서보갑선생님입니다.
* 찾아주시는 분들께 아름다운 노래 선사합니다. 즐감되소서....
岡山의 後樂園(오카야마의 고라쿠엔)- 日本 3대 庭園의 하나 ![]() ![]() ![]() ![]() ![]() ![]() ![]() ![]() ![]() ![]() 金澤 兼六園
** 서해의 절경 장고도를 가다! ** <2002년 1월 겨울방학을 맞아 야친회 행사를 마치고 쓴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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